중국 5.4문화운동의 위대한 인물이자, 중국인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혁명가 루쉰이 탄생한지 올해로 120주년을 맞는다. 중국인들에게 있어 루쉰의 존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영웅적인 위인이다. 그가 외치던 계몽사상은 현재까지도 중국인의 마음속 깊이 되새겨지며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루쉰의 위대함은 우리나라 독자들도 그의 작품을 통해 익히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가 남긴 업적과 발자취가 무엇이었는지 그의 탄생을 즈음해 재조명하려 한다.
루쉰의 욕, 양약고구(良藥苦口)
루쉰선생이 살던 1930년대, 중국사회는 여러 가지가 뒤죽박죽 얽힌 그야말로 혼란한 모순의 시대였다. 나라가 망해가는 시점에서, 루쉰이 한평생 중요하게 여긴 일은 중국 국민성의 연구와 그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었다. 이 분야에 있어서 그는 어떤 지도자나 정치가들보다도 큰 업적을 남겼다. 루쉰은 중국 새 문화에 기초를 다졌다. 중국인민공화국을 건립한 모택동도 살아생전에 루쉰에 대해 이렇게 평한바 있다. “루쉰 선생이 가는 방향이야 말로 바로 중국의 새문화가 나아갈 방향이다 라고.”
최근 몇 년 사이 출판된 서적중에는 루쉰에 대한 평가서들이 많다. 일부 내용들은 ‘루쉰은 욕하기를 너무 좋아한다, 음으로 양으로 루쉰은 꼭 욕을 통해서만 사회와 사람들을 평가했다’고 비판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루쉰한테 욕으로 평가받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독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루쉰이 욕을 하는 목적은 바로 국가와 중화민족문화의 존망(存亡)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었으며,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세대라면 그 사람이 중국인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루쉰이 한 욕에 대해 비판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향해 욕을 한 것 때문에, 일부 중국지식인들도 루쉰의 지나침을 지적하곤 한다. 루쉰은 어떤 문제의 가장 본질적인 면을 비판하려 했다. 그가 본 것은 어둡고 캄캄하며 낡아빠진채 계속되는 재난속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옛의식과 체면속에서 허덕이는 중국과 중국인들이었다. 그안에서 루쉰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그가 그리는 세상과 비교해 당시 중국과 중국인의 모습은 점점 위태로워만 보였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단 한문장도 중국을 찬양하지 않았다.
루쉰은 자신의 소설에서도 냉정하게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을 비교분석하곤 했다. 그는 너무나 나약한 중화민족을 위기로부터 구해내고 싶어했다.
자신의 삶에 엄격했던 루쉰
루쉰 선생의 생활중 기쁨과 행복한 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루쉰을 잘 이해못하는 독자들이라면, 그는 잔인하리만큼 그저 비판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유일하게 기쁨을 느끼고 찬양을 하는데 망설이지 않았던 상대가 있다면 바로 아이들이었다. 루쉰의 작품 중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웃음짓게 했던 작품은 바로 그의 산문집 <아침의 꽃을 저녁에 줍다(朝花夕拾)>이다. 이 작품은 루쉰이 과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 자신의 생명적 역정을 그린 작품이다.
루쉰에 대한 재미있는 통계도 이야기 할까 한다. 그가 평생동안 번 수입은 얼마나 될까? 루쉰이 베이징에서 공무원으로 지내던 14년동안 그의 수입은 지금 인민폐로 환산하면 160만위엔(2억5천6백만원)에 달한다. 평균 월수입은 인민폐 9000위엔(144만원)의 가치에 해당된다. 루쉰이 샤먼(厦門)과 광저우(廣州)에 있던 중장년기때는 전임대학교수로 지냈다. 그 곳에서 그의 연평균 수입은 17.5만위엔(2800만원)이었다. 상하이에 있었던 그의 말년에는 전문작가로서 9년동안의 수입이 210만위엔(3억3천6백만원)에 달했다. 이로 보아 루쉰은 그 당시 중산층에 해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돈은 혁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본래 루쉰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좋은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의 작품이나 평상시 알려진 그의 생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물론 작품이 작가의 모든 것을 대표할 수 는 없지만, 작품속에는 작가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기 마련이다. 루쉰은 자체가 모순이 많은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았으며,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자기만의 엄격한 원칙이 존재했던 사람이다. 친구들과 논쟁을 벌일때엔, 원칙에서 절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런 루쉰을 두고, 그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극단적이고 도전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루쉰에게서 더욱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억제’와 ‘인내’일 것이다.
루쉰은 사상가형 소설가로도 불린다. 그자신은 감정이 풍부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잘 억제할 줄 알고, 시시가각 분석할 줄 아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어떤 현상을 보고 자신이 느끼는 생각들을 잘 이해하고 분석한 후, 그것을 비로소 작품에다 표현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작품안의 주인공과 자신의 감정 사이에서 일정한 거리를 갖는 특징을 지녔다고도 볼 수 있다.
120년전부터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
루쉰의 사상이 최고로 성숙해진 것은 1920년 이후부터다. 유화진 등의 동지들이 이유없이 죽음을 당하자, 그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비통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고, 다른 문인들과의 논쟁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변론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작 표현방식에 있어서 적극적이지 못했다. 원인은 당시 그의 위치가 진독수나, 호적, 주작인보다 더 아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구체적인 이유는 바로 그가 <신청년(新靑年)>에서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라는 작품이 사실상 진독수나 기타 문인들보다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진짜 폭발하기 시작한 작품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아Q정전(阿Q正傳)>이다.
그가 중국인을 향해 외쳤던 수많은 구호중 ‘국민성의 변화’나’ 5.4운동의 결정’은 바로 진독수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진독수는 루쉰보다 이 문제에 대해 훨씬 빨리 깨달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그가 말년을 보냈던 도시, 상하이는 ‘동방의 파리’라 불릴만큼 아주 화려한 번화된 도시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도심속에서 고독함을 느꼈다. 물론 루쉰이 혁명에 성공한 이후에도 직면한 비관적인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루쉰은 중국인의 마음속 깊이 세워져 있는 영원한 기념비와 같다. 그가 의심했던 세계, 바로 먹구름속에 가려진 중국의 현실을 향해 그는 수백번, 수천번 총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총을 드는 그 자체가 아니었으며, 총을 든 그 순간에도 루쉰은 미래의 중국에 대해 무한한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왜 루쉰이어야 하는가? 이것은 아주 복잡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심취하게 만드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도 한번쯤 고민해 볼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루쉰은 중국의 기호이며, 상징이고, 하나의 표현이다. 혹자는 70년전 그가 존재했던 시대는 하나의 황금시대라고도 표현한다. 발전을 거듭하며, 여러 가지 모순된 문제에 부닥친 중국인에게 120년전 탄생한 루쉰이 현재, 미래에 미칠 영향은 두루두루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