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내게 빨간 색이 잘 어울린다고 했었어”, “내가 언제? 나는 빨간 색이 싫어. 이 케찹도 피 같아 싫단 말이야”
우리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거나 오해하는 것은 거창한 사건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가벼운 일상 속에서 비롯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꿈을 꾸게 된다. 그것은 항상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모든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겪고 있는 일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색깔 뚜렷한 연출가& 신선한 감각의 작가
<첼로와 케찹>의 연출은 극단 <창파>의 대표이기도 한 채승훈 씨가 맡았는데 그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실험극의
기수’로 유명하다. 김씨가 작품을 쓰고 연출까지 도맡아 한 ‘마의 태자’는 제3회 한ㆍ일 ART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이외에도 ‘햄릿머신’,
‘내가 죽은 이유’ 등 많은 작품에서 그의 실험성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변화된 그의 연출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작가는 연극평론가인 김명화 씨다. 그녀는 96년에 이 작품의 초고를 완성했고 2000년 다시 대본을 꺼내 손보기 시작했다. 김씨는
연극계에 신선한 자극을 던져주며 깊은 사색에서 피어나는 작품을 쓰기로 유명하다. 삼성 문학상 희곡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새들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다’로 급부상하여 섬세한 감성과 뛰어난 문장력을 보이고 있다.
<첼로와 케찹>은 남, 녀 두 명의 배우만이 등장한다. 우선 ‘첼로’로 대변되는 ‘남자’ 역은 남명렬 씨가 열연했다. 그는 ‘사람의
아들’, ‘거미 여인의 키스’, ‘이디푸스와의 여행’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여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케찹’으로 연상되는 ‘여자’
역은 김호정 씨가 맡았다. 그녀는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으며 ‘캣츠’, ‘너에게 나를 보낸다’, ‘바다의 여인’ 등
많은 작품에서 깊이 있는 연기를 보였다.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 다른 기억 더듬는 남자와 여자
조용한 무대 위로 첼로 소리가 흐른다. 한 여자는 양파를 까고 있고, 또 다른 공간에서는 남자가 발톱을 깎고 있다. 여자는 연신 매운 양파를
탓하며 눈물을 흘린다. 남자는 ‘눈물의 재클린 뒤 프레’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며 예전의 그녀를 추억한다.
매미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는 무더운 여름날,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 있다.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다가온 남자. 그는 선글라스를 건네주며 그녀의
곁에 앉는다. “당신 목소리는 첼로 소리 같군요” 여자가 말한다. 남자는 아무 말이 없다. 붕대를 감은 손만 보이면서. 한참을 있다 헤어지려는데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내 옆에 있어 줘요.” 지금 양파를 까고 있는 여자가 회상한 그와의 첫 만남이다.
‘툭툭투두둑’ 비가 무섭게 내리던 날,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한 남자가 다가온다. “당신 눈을 볼
수가 없군요. 선글라스를 벗어 보세요” 남자가 말한다. “당신 목소리는 첼로 소리 같군요” 라고 여자는 말하면서 빨갛게 충열된 눈을 보여준다.
눈 주위엔 눈물과 빗물로 씻겨진 마스카라 자국이 번져있고 립스틱을 바른 입술도 묘하게 망가져 있다. “함께 있어 주세요”라고 여자는 남자
손을 잡으며 말한다. 지금 발톱을 깎고 있는 남자가 추억한 그녀와의 첫 만남이다.
첼리스트를 꿈꾸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그 꿈을 접은 남자와 은행에 다니며 평범한 삶을 꿈꾸는 여자는 사랑을 시작했고 같은 공간에서 살게 된다.
그들은 같이 살면서 행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각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다르다. 남자는 항상 잃어버린 그 꿈속에 살고 여자는 현실 속에서
산다.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가 둘 사이에 어쩔 수 없는 벽을 생기게 한다.
그녀는 그를 너무도 사랑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첼로 소리는 싫어한다. 두통약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 정도이며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그 또한 첫 만남에서 그녀에게 했던 모든 말들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일상에 묻혀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남자는 ‘첼로’를 다시 연주하고 싶고 ‘눈물의 재클린’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같은 시간ㆍ같은 공간의 여자는 ‘케찹’이 잔뜩 뿌려진 볶음밥을
만들고 싶고 먹고 싶다. 이들은 순간 말이 없어진다.
연극을 보면서 관객들은 남자와 여자가 현재 헤어져 있는 상태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후반부의 작은 반전을 보면 그들은 여전히 같이 살고
있는 것으로 느낀다. 그러한 연극장치는 존재의 외로움의 본질은 정신적 괴리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함께 사는지 여부가 중요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사랑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기억을 다루고 있다. 영화 <오, 수정>에서 처럼 같은 상황 속에 있는 남자와 여자가 일부는
왜곡되게 또 일부는 아예 희미하게 자기중심적으로 기억하는 일들을 보여준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 사람과 온전히 공유했다고 느끼는 모든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를 말하고 있다.
“내가 바라본 건 붉은 네 입술, 붉은 옷, 붉은 구두. 정육점처럼 온통 붉은 색으로 얼룩진 모습뿐이었지. 핫도그 위에 덕지덕지 묻은 케찹처럼
시큼하고 시뻘겋게…케찹처럼? 그래, 케찹이 빠졌군. 볶음밥 맛이 허전했어, 뭔가 빠진 맛이었지”
“넌 사라졌지만 모든 걸 남기고 떠났지. 칫솔도, 잠옷도, 음반도, 레코드도. 이제 네가 없는 첼로 소리가 너 없는 자리를 대신 메꾸어줄거야.
난 언제나 첼로 소리를 좋아했지”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듯 두 사람은 말하고 있지만 사실 독백하고 있다. 객관적인 공간과 시간도 그 여자와 남자에게는 너무나 주관적이다.
‘사랑’을
소재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그려
이 작품은 사랑을 소재로 했지만 주제로 다루진 않았다. 단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서로간의 관계에 있어서
더 이상 감정적이지 않다. 사회적, 계약적, 물질적, 문명적인 관계만 존재할 뿐이다. 등장인물인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름은 없다. 특정인을
지칭하는 게 아닌 모든 사람들의 관계를 포괄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첼로와 케찹>이 공연된 문예회관 소극장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대학생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첼로와
케찹’이란 제목의 신선함에, 포스터의 속의 아름다운 결혼사진에 이끌려 ‘잔잔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기대하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연극을 다 본 후 그들의 반응은 ‘어렵다’, ‘모르겠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 연극은 나름대로 깊이 있는 ‘인간의 본질적 외로움’을
다루었지만 가슴으로 와닿는 대신 머리로 생각케 하고 모호한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장면에서 주제를 너무 추상화 해 ‘나름대로’의 깊이만 추구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공연장소:문예회관 소극장 공연시간:2001년 8월28일부터 9월13일까지 화,수,목 7시30분/금토 4시30분 7시30분 일, 3시 6시/ 월 쉼 공연문의:02)760-4800(문예회관), 011-9736-8186(극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