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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못난 짚신은 짝도 없다

시사뉴스 기자  2001.09.24 0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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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짚신은 짝도 없다



‘짝짓기 프로그램’ 조건 위주의 연애·결혼관을 반영, 재생산




남녀 짝을 맺어주는
TV 프로그램은 이제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아이템이 되었다. 94년만 해도 MBC <사랑의 스튜디오>는 파격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선남선녀가 나와서 짝을 찾기 위해 노골적인 애정 공세를 하며 엎치락뒤치락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현재 <사랑의 스튜디오>는 이른바 ‘짝짓기 프로그램’의 고전이 되었다. 방송가에 ‘짝짓기 프로그램’ 제작 열풍이 불면서 <사랑의
스튜디오>는 그 중 대체로 얌전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교체를 했다. 비슷한 소재로 승부를 걸다보니 파격의 강도가 점차 높아졌던 것이다.


여성이 평소 마음에 품어왔던 남성을 ‘찜’해서 공개 프로포즈를 하는가 하면(SBS <남희석·이휘재의 멋진 만남-청춘의 찜>),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애정 고백을 하고(MBC <이브의 성>), 맞선 현장을 중계방송하기도 하며(SBS <기분좋은밤-결혼할까요>),
여성의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남성이 가면을 쓰고 등장해 가면 속 얼굴을 맞추도록 하는 프로그램(SBS <장미의 이름-보이지 않는 사랑>)까지
선보였다. 이중 현재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은 MBC <사랑의 스튜디오>, SBS <기분좋은밤-결혼할까요>, SBS
<장미의 이름-보이지 않는 사랑>이다.


출연은 사회적 지위 순?

‘짝짓기 프로그램’이 이토록 장수를 누리는 인기 아이템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기분좋은밤>의 한경진 책임 프로듀서는 나름대로 인기 원인을 분석했다. “일반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시청자에게 호감을 샀다고
봅니다. 또 한가지, 데이트 현장을 세세히 지켜보는 포맷은 시청자의 훔쳐보기 심리를 만족시켜 줬으리라 짐작돼요.”

질릴 만도 한 TV 드라마의 사랑 이야기도 계속 먹히는데, 사실적인 남녀의 생생한 만남이 시선을 끄는 것은 당연하다. ‘짝짓기 프로그램’의
남녀가 드라마 속 보다 ‘현실적’인 것은 강점이지만, 어떤 면에서 그 ‘현실’을 주시하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연애·결혼문화의 현실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남은 일회적이며, 돈과 직업 또는 외모 등의 조건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그에 맞춰
남녀가 서로 거래되는 등 우리의 연애·결혼문화의 음지는 추하기 그지없다. ‘짝짓기 프로그램’은 이러한 남녀 만남의 부정적 세태와 학력과
외모 위주의 사회적 폐단을 고스란히 노출시킨다.

MBC <사랑의 스튜디오>가 한창 인기 절정일 때, <사랑의 스튜디오>에 출연하는 것은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말이 나돌았다. 쇄도하는 출연 신청으로 경쟁이 치열해진 까닭에 나온 말이지만, 출연자 선정 잣대에 대한 비아냥거림의 의미기도 했다. 그
동안 <사랑의 스튜디오>에 등장한 출연자들을 살펴보면 대졸 이상은 기본, 일류대 출신이 대다수이며 대기업 사원이거나 유망한 벤처기업,
고수입이 보장되는 전문직 종사자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회적 통념에 따라 여성 출연자는 여기에 조금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지방대 출신이나 전문대졸자도 있고, 유치원 강사나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 수입보다 여성스러운 직업의 소유자가 흔히 출연한다. 대신 ‘학벌이 안 되면 얼굴이 받쳐줘야’한다. 여성 출연자의 최대 요건은 외모다.
여기에 어리다 싶을 정도의 젊음까지 겸비하면 금상첨화. 21살, 22살의 대학생도 출연할 정도로 여성 출연자의 연령이 낮아진 추세다. 시청자
참여 게시판에는 “미팅 수준으로 전락했다”, “결혼에 대한 진지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사랑의 스튜디오> 제작진은 “남자는 32살까지 대졸자, 여자는 28살 초대졸자까지 선정 범위로 본다”고 밝혔다. 출연자 선정
기준이 지나치게 엘리트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이종혁 책임 프로듀서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다.

“출연자들이 서로 좋아할 만한 이성을 뽑게 된다. 굳이 떨어지는 상대를 내세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조건 위주의 이성관, 무비판적으로 반영

SBS <기분좋은밤-결혼할까요>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이 프로그램은 노총각·노처녀를 결혼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의 개념으로 시작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출연자의 연령이 낮아졌고, 조건도 화려해져갔다. 출연자의 선정 기준에 대해 한경진 프로듀서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뭉뚱그린
표현을 섰다. 구체적인 대답을 요구하자, “미디어상의 호감도와 출연자들끼리 잘 어울리는 사람” 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미디어상의 호감도’
가 외모와 엔터테이먼트적 기질, 학력과 직업 등을 가리킨다는 것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출연자의 화려한 사회적 지위는 SBS <장미의 이름-보이지 않는 사랑>에서 절정을 이룬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전문직 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필연적으로 출연자의 성향이 엘리트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기에 ‘외모적 조건’이 지나치게 중시된다는 것이다.

‘wlgodtnr0219’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너무 상업성만 내세우지 말고, 뚱뚱하든 얼굴이 못생겼든 진짜로 자기 일을 사랑하고 노력하는
사람을 초대하기를 바란다.” 고 지적했다.

출연한 여성의 ‘이상형’은 한술 더 뜬다. 학력과 외모, 직업 등 모든 면에서 겉보기에는 완벽한 일류다. ‘이상형’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암묵적으로 조건 위주의 이성관이 내재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집 프로그램이나 시사 프로그램에서 ‘일류주의’를
꼬집으면서도 오락 프로그램 한쪽에서는 열심히 ‘일류주의’를 만들어 내고 있는 상황이 공중파 방송의 두 얼굴인 것이다.


중매는 둘째, ‘쇼’가 첫째 , 시청자에게도 책임 있어

‘짝짓기 프로그램’의 또 다른 문제는 연애·결혼관의 가벼움을 조장한다는 점이다. 이성간의 만남이 가벼워진 것은 세태이기도 하지만, TV
프로그램이 그것을 선도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짝짓기 프로그램’은 명색이 중매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의 성격이 강하다. 출연자들의 외적 조건이나 말솜씨 등이 중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결혼이나 이성관과 관련한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쇼’적인 포맷으로 일관된다. 과장된 프로포즈 맨트가 난무하고, 화려한 데이트 장소가 소개된다. 남성 출연자가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장미의 이름-보이지 않는 사랑>같은 경우는 퀴즈 프로그램을 방불케 한다. 간단한 대화가 오고간 후, 여성
출연자가 가면쓴 남성 출연자의 얼굴을 느낌으로만 맞추어야 한다. 못 맞추면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자리에서 끝난다. 인간적 교감보다 ‘맞추기’가
우선 이다.

박미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방송모니터팀장은 ‘짝짓기 프로그램’의 ‘쇼’적인 현란함이 청소년에게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특히 우려했다.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데이트가 판치는 TV는 나이 어린 시청자들에게 은연중 외모와 물질 중심 사고 방식을 갖게 할 수 있다.”

TV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TV는 현실을 주도하기도 한다. TV가 부정적 현실을 다룰 때, ‘비판적’ 시각이 뒤따라야
하는 이유도 이점에 있다. 무비판적 반영은 하나의 재생산으로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짝짓기 프로그램’은 사회적으로 만연한 남녀 만남의 부정적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이성관의 편견을 당연한 것으로 인지하게 한다.
시청자 또한 외적 잣대로 TV속 출연자를 평가하는데 익숙해졌다. “쟤는 뚱뚱해”, “남자가 기우는데” 라며 출연자를 가리키는 시청자의 무의식적
손가락질들이 ‘짝짓기 프로그램’을 ‘지금 여기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정춘옥 기자 <www.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