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미술세계를 확립했지만,
동백림 사건으로 프랑스로 출국 후 끝내 이 땅에 돌아오지 못했던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공개 작품이 전시되었다.
서울 평창동 이응노 미술관에서 열리는 <60년대 이응노 추상화>전은 <42년만에 다시 보는 이응노 도불전>과 올 봄의
<60년대 이응노 꼴라주>전에 이은 세 번째 전시이다. 62년-67년 동안 고암이 파리에서 그린 62점의 추상화를 3차로 나누어(9월
15일-10월 14일, 10월 16일-11월 15일, 11월 17일-12월 15일) 20점 내외로 전시한다. 이번 전시는 60년대 초반의
종이를 뜯어 부친 콜라주에서 70년대 ‘문자추상’, 80년대 군상(群像) 연작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서예기법을 현대적 추상 언어로 재해석
고암 이응노의 시작은 수묵화였다. 그가 추상화를 본격적으로 제작한 것은 파리로 건너간 1960년대 이후이다.
서양미술의 본고장에서 고암은 한지와 수묵이라는 동양화 매체를 사용한 독창적인 추상의 세계를 창조했다. 고암은 전통 서예기법을 현대적인 추상
언어로 재해석한 60년대 작품을 가리켜 ‘서예적 추상’이라고 불렀다.
“이미 동양화의 한문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서예적 추상은 그 자원이 자연사물의 형태를 빌린 것과 음과 뜻을 형태로 표현한 것이니 한자 자체가
바로 동양의 추상적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고암의 추상화는 이처럼 동양 미학의 근본인 서화일치 사상을 추상화하는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60년대 고암 추상화의 특징은 한지 위로 수묵이 은은히 드러나면서도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필선의 역동성이다. 서예를 연상시키는 기호 형상과
먹의 농도에 따라 조절되는 미묘한 깊이감은 동양적 미학을 구현한 것이다.
풍경에 점을 찍으니 사람이 되더라
동시대의 꼴라주 작업에서는 입체적 마티에르로 형태를 지워나갔던 반면, 추상화에서는 어렴풋한 형태를 엿볼 수 있다.
“오래된 비석을 보면 오랜 세월 바람과 비에 닦여 닳아 없어진 몇 획에서 옛 언어를 찾아볼 수 있다” 는 박인경 여사가 전하는 고암의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의 추상화는 닳고 파인 돌비석에 새겨진 고대 상형문자를 연상시킨다.
상형문자가 자연의 형태와 의미에서 출발했듯이, 문자는 자체가 이미 추상이다.따라서 상형문자는 풍경, 동물, 사람 등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복잡한 필선들의 중첩과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으로 가득한 화면은 자연과 사람이 일체가 되는 한마당으로 화한다. 자연 속을 뛰어다니고 환호하며
얼싸안은 사람들의 이미지는 이미 80년대 군상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표현 속에서도 화면의 질서를 잃지 않는 절제된 색채와 구성이 고암 추상화의 묘미이기도 하다.
한편 콜라주 작업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는 풍상 맞은 돌비석 이미지에서 김미경 강남대 미술사 교수는 ‘역사에 대한 고암의 철학적 정신’을
읽는다.
“이국 땅에서도 파란만장한 한국의 현대사를 간직하며 인고의 세월을 내면으로 품는 작가의 외로움이자 비바람에 깎이고 깨어져도 묵묵히 감내하는
오래된 돌비석 같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어떤 시기의 작품에서도 내면적인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다.”
이순령 큐레이터는 추상화는 어렵다는 대중들의 선입견은 “작품을 읽어내려고 하니까” 생기는 문제라고 일러주었다.
추상화는 의미 파악보다 선과 색, 공간의 조형 요소와 개인적 연상작용을 즐기는 것이다. 이순령 큐레이터는 마음을 열고 작품과 일대일로 대면
할 것을 권했다.
문의 : (02)3217-5672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년 충청남도 홍성 출생. |
인 터 뷰 |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예술가의 정신, 고암이 늘 강조했던 |
정춘옥 기자 <www.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