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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아역부터 25년동안 닦아 온 연기의 내공

조종림 기자  2014.06.30 1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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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뉴스 조종림 기자]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음산한 밤, '숨바꼭질'을 알리는 휘파람 소리가 귓가를 맴돌면 몸의 세포들이 긴장한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겨 가까스로 연쇄살인범에게 풀려난 기억이 떠오르면,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직접 범인을 잡기로 했다. 그녀가 정신과의사가 된 이유다.

김민정(32)은 지난 3개월간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갑동이'에서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에 갇힌 '오마리아'로 살았다. 진짜 갑동이를 잡기 위해 카피캣 갑동이 '류태오'(이준)의 감정을 사냥개처럼 이용하기도 했다. 

지적인 의사, 발랄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주부, 관능적인 조선시대 미녀, 매서운 악녀 등 다양한 인물로 살아왔지만, 오마리아는 색깔을 단정 짓기에 어려운 인물이었다. 한없이 착한 정신과 의사이다가도, 짙은 화장과 과감한 의상을 입고 거리를 배회했다. 나긋한 목소리에서는 강인함이 느껴져야 했으며, 긴박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됐다.

김민정은 "너무 어려웠다"고 울상을 지었다. "(권음미) 작가 언니가 드라마에서 가장 쓰기 어려운 사람도 마리아고 가장 힘들었던 캐릭터도 마리아라고 할 정도였어요. 왜 이중적인 모습으로 사는지에 대해 이해해야만 했어요. 또 그걸 영상으로 전달하는 게 제 임무였죠. 대사 톤 하나만 잘못해도 줄에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이제껏 맡았던 역할 중 가장 신경 쓰고 힘들게 연기했던 것 같아요." 

영화 '양들의 침묵'(1991)의 조디 포스터의 연기를 마음에 품었다. "지적이면서도 강하게 나온다. 범죄자를 대면했을 때 나오는 불안감이 묻은 표정이 좋았다. 상처를 지닌 사람은 정도의 차이일 뿐, 상처에 대한 자신만의 방어벽을 친다. 오마리아에게는 가발과 메이크업이 도구였다." 

"이 작품에서 마리아가 조금 더 성숙해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민정이 가진 얼굴보다 더요. 좀 더 지적이게 보여서 '저 여자 뭐야?'하는 반응이 나오길 바랐죠. 표정도 많이 빼고 말투도 툭툭 내뱉었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여자가 점점 감정이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었거든요."

시험을 앞둔 수험생 같았다. 김민정은 오마리아라는 숙제를 풀기 위해 캐릭터를 끊임없이 연구해나갔다. "드라마가 끝났는데 후회가 없다. 100% 만족한 작품은 이제껏 없었다. 이번 작품도 최고는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더 할 게 없었다. 후회가 없다 보니 마리아를 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회상했다.

김민정은 작품에서 빠져나오는 데 오래 걸리는 배우다. 작품 활동이 더딜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마리아를 벌써 떠나보낼 준비가 됐다니 의아하다. "직장인들은 매일매일 인생을 배우잖아요. 일상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처럼요. 배우는 현장이 그런 곳이에요. 20대 때는 현장에서 너무 떨어져 있지 않았나 싶어요. 이 부분을 받아들인 것 자체가 제가 많이 변화한 것 같아요."

"오마리아처럼 저에게도 트라우마가 있었어요"라고 고백했다. "트라우마가 제 행동과 사고, 관점에 영향을 많이 미쳤죠. 어렸을 때 저라는 사람을 알기도 전에 일을 시작했어요. 나라는 사람이 완성되기도 전에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보는 나'가 아니라 '남이 보는 나'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었죠. 다른 사람들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던 시간인데, 저는 자신을 찾아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학교에 가도 선후배, 친구들이 다 쳐다보고 있었고요. 학교에서 고개를 숙이고 걸어 다녔던 것 같아요. 알게 모르게 그 시절의 제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시절도 상처가 아니라 기억으로 남으면 된다는 것도 알았죠."

김민정은 "아역탤런트로 활동을 안 했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좀 더 편했을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어렸을 때는 완벽주의자였다. 나를 먼저 힘들게 볶고, 의도치 않게 주위사람도 힘들게 했다. 내가 여유가 없으니 주변까지 전파되는 걸 깨닫고…. 이런 성격이 아무 데도 도움이 안 되는 걸 알았다. 마음을 바꿔먹었다"는 것이다.

"포기할 땐 포기하고 내려놓을 땐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 일은 도 닦는 일이다. 변수도 많고 규칙적이지도 않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잦다. 그래서 자기 관리가 더 필요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게 가장 핵심이다."

시간이 나면 늘어지기보다는 등산을 즐긴다. 가끔은 혼자서도 간다.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집에서는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기도 한다. 나와의 소통을 마치고 나면 작품에 대한 욕심도 치솟는다.

"활동이 왕성했을 때처럼 욕심이 생겨요. 일에 대한 욕심이 많다가 중간에 벽에 부딪혔었거든요. 그런 시간을 겪고 나니 다시 예전같이 일이 소중해졌어요. 25년을 일했잖아요. 직장으로 따지면 퇴직할 나이예요. 하하. 파도가 치던 위기가 기회가 된 것 같아요. 내 일을 소중하다고 느끼고 사랑하는 것 자체에 너무 감사해요"라며 웃었다.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둠을 뿜어내던 '오마리아'다. 하지만 김민정은 그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하다. "다음 작품에서는 밝고 사랑스럽고 밝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라는 기대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