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쇼핑’은 지극히 일상적 행위다. 스위스 태생의 작가 실비플러리는 이러한 일상을 미술로 전환한다. 11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실비플러리 개인전 ‘O’에는 쇼핑이라는 일상에 대한 다양한 감각과 담론이 전개된다.
예술은 거대서사에서 벗어나 일상적 소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현대에는 일상 자체가 예술 작품으로 재창조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기성품을
작품으로 치환시킨 작업 형태는 여러 작가들에게서 보인다. 실비플러리는 일상적 행위 중에서 ‘쇼핑’을 선택해, 쇼핑한 물건들과 쇼핑백을 진열하여
자신의 쇼핑과정을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들로 알려져 있다.
‘뷰티’ 컨셉으로 다중적 코드 제시
2000년 광주 비엔날레 초청작가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실비플러리는 80년대 뉴욕 언더그라운드 예술세계에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그녀가 유럽 미술계에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의 ‘쇼핑백’ 작업을 시작하면서이다. 유럽의 유명 패션쇼에 대부분 참석할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깊은 그녀는 스스로도 쇼핑광이라고 밝힌다.
이번 전시의 핵심도 ‘쇼핑’이다. 작가는 부채꼴 형태의 2층 전시 공간을 거대한 캔버스로 이용해, 월 포스터, 네온, 화장품 등의 매체를
사용하여 공간 ‘페인팅’을 했다.
벽면은 ‘O’라는 문자의 반복으로 메워져있다. 전시의 타이틀이기도 한 ‘O’는 랑콤의 향수 이름을 차용한 것이지만, 누구나 사용하는 감탄사이기도
하다. 거대한 쇼핑백을 연상시키는 윌 포스터 작업을 통해 작가는 쇼핑과 패션을 우상화시키는 새로운 기호를 창출한다.
윌 포스터 표면에 일렬로 정렬해 있는 네온작품의 문구들은 화장품 광고카피들이다. 형태가 쉽게 인지되는 ‘O’와 대조적으로, 띄어쓰기 없이
연결되어 있는 이 단어들은 관객의 집중을 요구한다.
전시장 바닥에는 자동차가 밟고 지나간 화장품들이 흩어져 있다. 이 작품은 경주용 자동차 레이서와 실비 플러리의 퍼포먼스 결과물이다. 작가는
화장품들의 다양한 색조를 통해 바닥에 올오버 페인팅을 만들어냈다.
피상적인 뷰티 컨셉이 제시하는 이러한 다중적 코드를 통해 작가는 관객과 소통을 시도한다. 동시에, 패션, 뷰티, 쇼핑 컨셉은 작가의 ‘포스트
페미니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페미니즘이 남성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저항이었다면, 90년대 들어 활발해진
‘포스트 페미니즘’은 여성성의 예찬과 부각이 특징이다.
‘포스트 페미니즘’의 선도 작가인 실비플러리는 여성 이미지의 피상적 소재들을 예술과 연결함으로써, ‘포스트 페미니즘’을 구체화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패션 트렌드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취하고 사용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일상과 미술사의 자유로운 차용
3층 전시공간은 청동주물 조각과 비디오 프로젝션으로 이루어졌다. 인조털로 장식된 입구 공간에는 은색의 청동 조각들이 부띠끄에 진열되듯이
전시되었다. 작가는
자신이 구입한 상품들을 견고한 청동주물로 변환시키고, 상품들의 본래 장소인 부띠끄 공간을 연출해 조각을 배치했다. 상품에서 작품으로, 그리고
다시 ‘상품’으로 전환된 이 작업은 패션과 예술의 상호교류를 잘 보여준다.
작품에 설치된 조명은 ‘색 치유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색 치유법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는 다양한 색상의 조명을 통해 관객들이
필요한 색을 흡수할 수 있도록 젤라틴 페이퍼를 이용하여 조명을 변형시켰다.
비디오 프로젝션은 모두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Walking on Car I Andre’는 여성의 다리만을, ‘Zen&Speed’는
전신 모델을, ‘Beauty Case’는 뒷모습만을 포착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여성성과 남성성의 조화를 통한 에로티즘적 암시를 함축하고
있다.
휴고 보스의 의뢰로 디자인된 자동차 경주선수 유니폼 패션쇼를 담은 ‘Zen&Speed’와, 실비플러리가 자신의 뷰티 케이스를 자동차
트렁크에 넣고 차를 타고 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Beauty Case’는 모두 남성적인 상징을 여성적으로 전환시킨 포스트 페미니즘적 작품이다.
칼 앙드레 작품 위에서 구두 패션 쇼 장면을 찍은 ‘Walking on Car I Andre’. 이 또한 성적 조화라는 차원에서 읽을 수
있지만, 80년대적인 코드로 해석되어지기도 한다. 큐레이터 유명환씨는 “칼 앙드레를 여성이 밟고 지나간다는 설정은 남성 권력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페미니즘’적인 작품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Walking on Car I Andre’는 현대미술사의 남성작가들을 차용한 실비플러리의 작품 중 하나이다. 소프트 터치로 남성 작품들을
변용한 이전 작품과는 달리, 직접적이고 유머러스한 방법으로 접근한 점이 독특하다.
실비 플러리의 작품은 일상과 미술사에 이미 존재하는 형태를 자유자재로 차용하고 독창적인 예술로 전환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는 패션,
쇼핑, 뷰티의 언어를 통해 피상성, 외향, 페티시즘, 페미니티 등을 비평적 시각 없이 그대로 제시한다. 실비플러리의 작품은 다양한 각도의
해석을 끌어내면서,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인식하는 열쇠로 작용하는 것이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