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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배우 서주희

시사뉴스 기자  2001.11.19 0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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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실에 한발 더 다가서는 연기하고 싶다”



‘꽃섬’이어, ‘버자이너 모놀로그’ 출연하는 배우 서주희



‘레이디 맥베드’,
‘오이디푸스’, ‘세 자매’ 등의 ‘신들린 연기’로 대중의 가슴에 각인된 배우 서주희(34). 제작 과정이 고생스럽기로 알려진 디지털 영화
‘꽃섬’에 뛰어들었던 그녀가 또 한 번의 대형 ‘사고’를 쳤다.

여성 성기의 혁명을 외치는 모노드라마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도전한 것이다. “이것을 내가 선택했다니, 미쳤었나 보다”며 그녀는 버거움을
하소연했지만,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찾는’ 그녀의 여행은 이미 먼 길을 와 있었다.


-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여성의 성’에 대한 대담한 접근 때문에 많은 중견 여배우들이 캐스팅을
고사했다는데 선뜻 출연을 결정했습니까.


선뜻 못했죠. 처음에 책을 읽었을 때 너무 놀랐어요. 원작을 검토해보고 기획사에 전화를 주기로 했는데 쇼크가 커서 통화조차 회피하고 싶었죠.
그래도 약속이니까 전화를 하긴 했는데, ‘저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만 하고 끊었어요. 그 후, 다시 객관적인 시각으로 책을
여러 번 읽었죠.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현대의 사람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차분히 형상화해 보니,
꼭 해야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어떤 면에서 ‘해야할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까.

성에 대한 담론은 늘 음지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져 왔어요. 여기저기에서 쑥덕거리고, 모두가 다 알고 있었으니 비밀이면서 비밀이 아니었죠.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가 이루어지다 보니, 성은 불결하게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어요. 성을 건전한 양지로 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언어나 인식의 폭력으로 상처받고 억압되어왔던 성을 즐겁게 이야기함으로써, 성의 치유 과정을 제시한 연극이 ‘버자이너 모놀로그’입니다. 공연을
통해, 성의 구체적 토론이 일상에서 이루어진다면 의미 있는 작업이 되리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우리말 제목을 쓸 수 없는 현실



- 초연과 차별되는 점은 무엇입니까.

초연에는 미국적인 화자가 등장해서, 서양 현실을 위주로 극이 진행되었어요. 아무래도 관객이 가슴으로 공감하기는 힘든점이 있었죠. 이번 앵콜
공연은 원작을 한국적인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에 신경을 썼습니다.



-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여성의 성기를 드러내어 말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연극인데, 제목이
우리말로 번역되었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번역하면 ‘보지의 독백’ 정도가 될텐데. 우리 사회의 현실에 ‘보지의 독백’을 포스터에 새겨 넣고 광고할 수 있을까요?
관객들이 매표소에서 ‘보지의 독백 한 장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목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가 공연 내용에도 있어요. 영어 제목을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우리 성문화의 현실이기도 하니까요. 2차 포스터를 ‘보지의 독백’으로 하는 계획도 있는데 딜레마네요.



- 연습 과정은 어땠습니까.

책 한 권이에요. 책 한 권. 제가 연기해야 하는 분량이 딱 책 한권이에요. 시사적인 단어나 생경한 용어들도 빈번해서 대사 외우기도 힘들어요.
더구나 다양한 인물의 인터뷰 형식 대본이라서 그 많은 인물들을 체화시키고, 급격하게 변신을 거듭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힘드네요.



- 성기의 명칭을 입에 담는 것이 어려웠을 텐데.

너무나 어려웠죠. 지금도 대본 읽을 때 외에는 거의 쓰지 못하고 있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만 사용하지, 일상적인 용어로는 저도 아직 입에
못 담겠어요. 사전에서 ‘보지’는 장음이거든요. 그런데 욕으로는 단음으로 발음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항상 장음으로 발음하죠.(웃음)



- 어떤 연기를 지향합니까.

항상 넘치는 것이 모자라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왔어요. 노인이라면 기침을 콜록콜록 한다거나하는, 전형화된 가짜연기는 지양하려고 합니다.
인물의 진실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서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원작을 더 깊이 느낄 때, 재도전할 것



- 페미니즘적인 성격이 강한 연극인데 여성의 삶에 대해 평소 관심 있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생각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어요. 이번 연극으로 여성 운동가들을 만나면서 많이 알게 되었죠.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가입을
적극 권유하고 있는데, 그쪽으로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전 스폰지 같은 여자라서 쉽게 영향을 받거든요. 언젠가 여성 문제를 깊이
공감하게 될 때, 새로운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시도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운동차원 보다는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에 초점을 맞출 거예요.
제가 느끼는 것이 그 정도니까요. 그 이상을 하게 되면 본질이 변질되고 외형적으로 가게 될 것 같아요.



- 영화 ‘꽃섬’ 작업이 힘들었을 텐데.


너무나 힘들었어요. 육체적 고통의 극단에 온 느낌이었죠. 하지만, 즐겁고 편안한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씬을 시도할 수 있고, 배우의
몫이 분할된다는 점이 영화의 장점인 것 같아요.



- 탤런트 공채로 연기를 시작했는데 연극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연극이 저에게 잘 맞아요. 배우의 책임감이 막중하다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관객과 직접적으로 대면한다는 것은 큰 매력입니다. 연극 관객은
다른 장르의 관객과 달라요. 그들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 같아요. 연극의 3요소에 관객에 있듯이, 관객은 연극을 함께 완성하는 존재입니다.
관객이 전달하는 에너지는 제게 너무나 소중해요.



- 연출가 이지나씨와는 호흡이 잘 맞나요.

무척 든든해요. 이지나씨는 대단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연출가예요. ‘록키호러쇼’의 연출 경력 때문에 산만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정돈된
사람이더군요. 작품에 따라 연출 스타일을 달리하는 감각이 있는 거죠. 대중적 코드를 감지하는 본능도 뛰어나고요.


“예쁘게 찍겠다”는 사진기자의 말에, 서주희는 “예쁘게 나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이 단순한 미모를 넘어
드라마를 간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 말이었다.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화장품이 아니라, ‘배우답지 않은 털털함과 배우다운
마력의 조화’가 아닐까.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