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맥베드’,
‘오이디푸스’, ‘세 자매’ 등의 ‘신들린 연기’로 대중의 가슴에 각인된 배우 서주희(34). 제작 과정이 고생스럽기로 알려진 디지털 영화
‘꽃섬’에 뛰어들었던 그녀가 또 한 번의 대형 ‘사고’를 쳤다.
여성 성기의 혁명을 외치는 모노드라마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도전한 것이다. “이것을 내가 선택했다니, 미쳤었나 보다”며 그녀는 버거움을
하소연했지만,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찾는’ 그녀의 여행은 이미 먼 길을 와 있었다.
우리말 제목을 쓸 수 없는 현실
- 초연과 차별되는 점은 무엇입니까.
초연에는 미국적인 화자가 등장해서, 서양 현실을 위주로 극이 진행되었어요. 아무래도 관객이 가슴으로 공감하기는 힘든점이 있었죠. 이번 앵콜
공연은 원작을 한국적인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에 신경을 썼습니다.
-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여성의 성기를 드러내어 말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연극인데, 제목이
우리말로 번역되었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번역하면 ‘보지의 독백’ 정도가 될텐데. 우리 사회의 현실에 ‘보지의 독백’을 포스터에 새겨 넣고 광고할 수 있을까요?
관객들이 매표소에서 ‘보지의 독백 한 장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목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가 공연 내용에도 있어요. 영어 제목을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우리 성문화의 현실이기도 하니까요. 2차 포스터를 ‘보지의 독백’으로 하는 계획도 있는데 딜레마네요.
- 연습 과정은 어땠습니까.
책 한 권이에요. 책 한 권. 제가 연기해야 하는 분량이 딱 책 한권이에요. 시사적인 단어나 생경한 용어들도 빈번해서 대사 외우기도 힘들어요.
더구나 다양한 인물의 인터뷰 형식 대본이라서 그 많은 인물들을 체화시키고, 급격하게 변신을 거듭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힘드네요.
- 성기의 명칭을 입에 담는 것이 어려웠을 텐데.
너무나 어려웠죠. 지금도 대본 읽을 때 외에는 거의 쓰지 못하고 있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만 사용하지, 일상적인 용어로는 저도 아직 입에
못 담겠어요. 사전에서 ‘보지’는 장음이거든요. 그런데 욕으로는 단음으로 발음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항상 장음으로 발음하죠.(웃음)
- 어떤 연기를 지향합니까.
항상 넘치는 것이 모자라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왔어요. 노인이라면 기침을 콜록콜록 한다거나하는, 전형화된 가짜연기는 지양하려고 합니다.
인물의 진실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서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원작을 더 깊이 느낄 때, 재도전할 것
- 페미니즘적인 성격이 강한 연극인데 여성의 삶에 대해 평소 관심 있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생각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어요. 이번 연극으로 여성 운동가들을 만나면서 많이 알게 되었죠.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가입을
적극 권유하고 있는데, 그쪽으로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전 스폰지 같은 여자라서 쉽게 영향을 받거든요. 언젠가 여성 문제를 깊이
공감하게 될 때, 새로운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시도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운동차원 보다는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에 초점을 맞출 거예요.
제가 느끼는 것이 그 정도니까요. 그 이상을 하게 되면 본질이 변질되고 외형적으로 가게 될 것 같아요.
- 영화 ‘꽃섬’ 작업이 힘들었을 텐데.
너무나 힘들었어요. 육체적 고통의 극단에 온 느낌이었죠. 하지만, 즐겁고 편안한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씬을 시도할 수 있고, 배우의
몫이 분할된다는 점이 영화의 장점인 것 같아요.
- 탤런트 공채로 연기를 시작했는데 연극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연극이 저에게 잘 맞아요. 배우의 책임감이 막중하다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관객과 직접적으로 대면한다는 것은 큰 매력입니다. 연극 관객은
다른 장르의 관객과 달라요. 그들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 같아요. 연극의 3요소에 관객에 있듯이, 관객은 연극을 함께 완성하는 존재입니다.
관객이 전달하는 에너지는 제게 너무나 소중해요.
- 연출가 이지나씨와는 호흡이 잘 맞나요.
무척 든든해요. 이지나씨는 대단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연출가예요. ‘록키호러쇼’의 연출 경력 때문에 산만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정돈된
사람이더군요. 작품에 따라 연출 스타일을 달리하는 감각이 있는 거죠. 대중적 코드를 감지하는 본능도 뛰어나고요.
“예쁘게 찍겠다”는 사진기자의 말에, 서주희는 “예쁘게 나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이 단순한 미모를 넘어
드라마를 간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 말이었다.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화장품이 아니라, ‘배우답지 않은 털털함과 배우다운
마력의 조화’가 아닐까.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