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전쟁은 의문투성이의 역사로 남아있다.
최강국 미국은 '통킹 만 사건'을 계기로 1964년 북베트남(월맹)에 폭격을 가한이래 1968년까지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했다.
남베트남(월남)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미군과 함께 전쟁에 참여한 한국 역시 30만 명이 넘는 전투 병력을 파병했다.
하지만 미국은 3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패퇴하고 말았다. 미군이 시종일관 고전한 이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나름 혁혁한 전과를 올린 한국군도 1만6000여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손실을 입은 상태에서 철군하고 말았다. 1975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협공을 받은 남베트남은 공산화의 길로 접어든다.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자유진영이 패배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비역 대령 김형석(74) 은 당시 신출내기 장교로 1966년 수송선 빅토리아호를 타고 남베트남에 상륙한 이래 1968년까지 3년 동안 정글에서 베트콩과 사투를 벌였다.
그의 자서전 '초급장교 야전근무-석도의 투혼'(지식공감 刊)은 초급장교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르면서 진정한 지휘관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담았다.
동시에 미군은 물론 한국군이 이 전쟁에서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의 기록을 담은 베트남 전쟁의 비망록이기도 한다. .
김 대령이 회고한 1, 2차 닌호아 전투에서의 패배는 이 전쟁에서 한국군이 펼친 전략 전술의 문제점을 공개한다.
가령 당시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김 옹은 다분히 정치적인 슬로건으로 명분은 훌륭했으나 일선 부대의 전술 운용에는 큰 타격을 입혔다고 비판한다.
남녀노소, 비전투원을 혁명 일꾼으로 활용한 월맹의 전술은 실로 변화무쌍했고, 명분에 발목이 잡힌 일선 부대는 희생자를 낸 뒤에 허둥지둥 대응하는 일을 반복했다.
김 대령은 "한국군은 이 전략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지 못했다"며 "한국군 장교들은 정규전 부대만이 전쟁을 주도하고 정예부대만이 승리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더욱이 전공을 과장하거나 허위로 보고해 훈장을 받는 지휘관들의 행태도 부대원들의 사기를 저하시켜 궁극적으로는 전투력에 피해를 입혔다고 평가했다.
실패의 역사만 기록된 것은 아니다.
매복, 동굴수색, 식수조달, 포로 진술 등 야전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상황에 획득한 전략적 유연성은 베트남 전쟁이 남긴 소중한 유산이라고 김 옹은 전한다.
이 책에는 후배 군인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당시 전투 상황도와 함께 자신의 전략적 판단을 상세히 소개했다.
이병태 전 국방부 장관은 추천사에서 "시중의 참전수기가 자신과 부대의 실패를 묻어두고 상황을 미화하여 독자가 영웅적 활동에 감동하도록 유도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그러나 이 책은 저자와 그가 속했던 상·하급자의 활동을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숨김없이 사소한 부분까지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어지간한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보통의 소대장으로 열대의 정글 속에서 겪은 온갖 고초들을 인위적 조작 없이 솔직하고도 담담하게 써놓았기에 오랫동안 여운이 깃든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전 장관은 "이 책을 읽으면 직업군인들은 어디에서도 얻기 어려운 전투실상을 경험하는 동시에 군 복무지표가 될 교훈을 얻을 것이며 역사가들은 월남전의 진실에 매료될 것"이라며 "참전용사들은 젊음을 불태우며 순수한 희생정신을 발휘했던 자랑스러운 자신을 반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김형석 대령은 전주고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합참 합동전략판단장교, 특전사 감찰참모, 횃불부대연대장 등을 역임한 뒤 예편해 KBS안전실장을 지냈다. 현재 북극성안보연구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호 '석도'(石道)는 '돌밭 길 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집스럽게 군인의 길을 걸어온 노병(老兵)의 삶을 은유한다. <출처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