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아라 기자] 힐러리 클린턴의 우세로 전망됐던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세계 각국이 ‘트럼프 시대’ 대비책에 고심하고 있다. 앞서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 탈퇴가 결정된 영국의 사례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최근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자국우선주의 강화와 함께 반세계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8일 대선 결과에 따라 내년 1월20일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는 대선 과정에서 여러 차례 ‘미국 국익 최우선주의’를 강조해왔다. 지난 4월에는 외교정책 연설에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 미국이 이미 체결한 FTA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FTA가 제조업 일자리를 파탄내고 있어 자국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무역흑자국’, ‘미국 동북아 안보 정책의 무임승차국’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트럼프의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가 주요 전문기관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은 가운데, 트럼프의 예상 밖 당선은 미국 내에 불고 있는 반세계화 기조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의회 환경이나 국제 통상 규범 등을 고려했을 때 트럼프의 과격한 보호무역 정책이 그대로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뿐만 아니라 최근 선진국을 중심으로 반세계화가 확산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가 결정된 것도 이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결국 EU에 잔류할 것’이라는 당초 전망과 달리 영국은 지난 6월23일 국민투표를 거쳐 찬성 52%로 브렉시트를 결정한 바 있다.
반세계화, ‘일시적’ 아닌 중장기 트렌드
지난 9일 발표된 ‘불확실성 높은 트럼프 시대의 세계경제’ 보고서에서 LG경제연구원 김형주·이광우·이창선 연구원은 “트럼프의 승리는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진 미국 유권자들이 정치 향방을 좌우할 정도의 다수 세력으로 자라났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미국이 세계경제 통합, 글로벌 리더십 확대 등을 통해 공들여 추구해온 세계화의 혜택이 국민 다수에게 골고루 배분되지 않고 일부 유망 산업 종사자들과 여성, 유색인종, 이민자 등에게 지나치게 많이 돌아간다는 인식이 트럼프 캠프의 선거 전략과 잘 맞아떨어지면서 승리를 견인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7일에는 신민영·정성태 연구원이 ‘반세계화 시대의 세계화’ 보고서를 통해 “브렉시트와 트럼프 현상을 기점으로 그간 산발적으로 나타났던 선진국에서의 반세계화 움직임은 거대한 흐름이 됐다”며 “이 같은 배경에는 장기간의 저성장, 높은 실업률,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무기력한 기존 정치시스템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확대됐던 선진국의 소득불평등은, 대내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기술변화, 대외적으로는 세계화의 영향이 컸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반세계화 흐름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일자리 문제가 중대한 정치·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유럽에서는 난민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연구원은 “그간 세계화를 이끌어왔던 선진국에서 구조적으로 소득분배가 악화되는 추세에 있고,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정당들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세계화의 동력과 지지 세력이 크게 축소된 모습이어서 반세계화 움직임은 일시적이 아니라 중장기적 트렌드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불만해소 위해 자국우선주의 채택
선진국에서 일고 있는 반세계화 움직임의 주요 경제적 이슈는 저성장과 일자리다.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지난 5월 조사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들은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일자리(84%)와 이민자(71%)를 꼽았다(복수 응답).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청년실업률이 각각 45.7%, 27.8%에 달할 만큼 유럽에서도 일자리는 심각한 경제 문제다. 이로 인한 불만을 쉽게 해소하고 단기간에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각국 정부는 자국우선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자국우선주의에 따라 각국은 대외적으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외국 기업을 배제하는 모습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LG경제연구원은 이러한 징후에 대해 최근 미국의 통상정책 변화를 언급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WTO를 통한 무역 분쟁 해결을 선호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양자간 분쟁 해결 방식을 선택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는 것. 예를 들어 미국은 인도네시아(담배)나 브라질(면화)과의 무역 분쟁을 WTO를 거치지 않고 당사국 정부와 직접 해결한 바 있다. 또한 최근에는 반덤핑 항소절차를 수입 기업에 불리하게 변경하는 정책도 병행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에 대한 과세도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최근 EU 집행위원회는 애플, 구글, 스타벅스, 피아트 등 다국적 기업에 세금특혜를 부여한 아일랜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에 세금추징을 요구했다. 이들 기업은 무형자산인 특허와 아일랜드 등이 부여한 세제상 혜택을 이용해 EU 내에서 벌어들인 수익에 대해 극히 낮은 법인세만을 납부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선진국 중심으로 일고 있는 반세계화 움직임에 따라 우리 경제와 기업 활동을 둘러싼 불확실성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반세계화 시대의 세계화’ 보고서에 따르면 국가간 분쟁과 미국-중국의 통상마찰로 차이나 리스크가 확대되고 주요국가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환율의 변동성도 확대될 전망이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는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IMF의 분석에 따르면 2008년 이후 교역 감소의 25%가량이 보호무역주의 흐름에 기인해 이뤄졌다. 이 같은 점을 고려했을 때 향후 보호무역주의 등 세계경제질서의 변화에 따른 교역감소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