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2016년 트렌드를 이끈 핵심 키워드는 여전히 불황이다. 불황은 ‘가성비’를 최고의 가치에 올려놓았다. ‘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합리성’을 중시하는 가치관의 확산은 진짜보다 값싸고 편리한 가짜를 선호하게 만들었고, ‘미니멀리즘 ’자급자족‘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게 유도했다. 각자도생 물질주의에 대한 거부도 불러왔다. 소유가 아닌 존재에 대한 성찰 속에서 행복을 찾는 ’물결‘이 확산되고 있다. ’가난‘은 때로 정
신을 맑게 해준다.
가성비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온 경제불황이 계속되면서 ‘가성비’는 올해도 가장 강력한 소비트렌드였다. 편의점 도시락이 불황의 시대에 나 홀로 질주했고, 파격적 가격을 앞세운 생과일주스 브랜드 ‘쥬씨’는 승승장구했다. 대형마트의 PB 제품도 인기를 끌었다. 2015년 출시한 이마트의 PB브랜드 ‘노브랜드’는 ‘브랜드’ 자체를 부정하며 가성비 트렌드에 적극 동참해 높은 매출을 기록했다. 가성비 개념은 경제적 압박에 허덕이는 서민층에서 ‘브랜드’의 가치를 버리면서 시작됐지만, 이제는 상류층에게까지 확대돼 ‘프리미엄 가성비’라는 단어까지 만들어냈다.
페이크슈머
가성비의 확장된 개념인 페이크슈머(Fakesumer)는 고가의 명품을 소비하는 대신 값싸지만 명품과 비슷한 대체재를 선택하는 소비 형태다. 페이크슈머는 가격 외에도 시간과 노동 등의 복합적 가치가 반영된 가성비 소비다. 이를테면 돈이 많이 들뿐 아니라 노력과 시간, 심리적 노동까지 드는 연애나 여행 등의 체험도 가짜로 하는 것이다. 구글 어스 스트릿뷰로 세계 여행을 한다거나, 방안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고 가상연애시뮬레이션으로 연애를 경험한다. 게임을 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아프리카TV의 게임방송을 보고 즐기기도 한다. 페이크슈머는 불황 이외에도 현대인의 정신적 피로와 인간관계에 대한 권태감 등을 잘 보여준다.
미니멀리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버리고 비웠더니 행복이 찾아왔다’ ‘작은 집을 권하다‘ 등 심플라이프 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다. ‘가성비’의 효율적 소비를 넘어서 아예 ‘무소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의 것만 남겨두고 버리는 삶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은 자본주의 물질주의의 극단에서 소유에 대한 회의를 반영한 라이프 스타일이다. 또한, 넘쳐나는 정보와 글로벌 시대의 복잡해지는 사회구조에 대한 스트레스의 반대급부이기도 하다. 더 화려한 것, 더 많은 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정신적으로 더욱 빈곤해지는 구조에서 물질주의가 삶의 허상이라는 깨달음이 깊어지고 있다. 미니멀리즘 또한 가성비의 테두리 안에 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행복이며, 이 행복이 작은집과 더 작은 소비와 최소한의 소유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가성비의 논리에 더 들어맞는 것이다.
자급자족
MBN ‘나는 자연인이다’, tvN ‘삼시세끼’의 인기는 미니멀라이프와 자연주의라는 트렌드를 확인시켜준다. 과거 자연주의에는 그림 같은 전원주택이 핵심이었지만, 현재는 가난한 시골 농가 정도면 충분하며, 더 나아가 직접 만든 나무집이나 흙집, 심지어 천막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발견한다. 풍요 속의 빈곤에 빠진 현대인들은 빈곤 속의 풍요라는 해결책을 찾고 있다. 옷도 가구도 직접 만들고, 내가 먹을 것을 스스로 재배하는 ‘불편한 삶’ 속에서 ‘가치’를 찾는 사람들이 여전히 주류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흐름’인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혼족문화
1인가구의 급증 속에서 1인 단위의 소비형태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한해였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여행가고, 혼자 노는 싱글 라이프가 확산되면서 관련 산업도 커졌다. 혼족문화는 피곤한 감정노동을 거부하고 소박한 개인의 욕망에 집중하는 일상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지기 위해 가면을 쓰고 권위에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고 가까운 곳을 산책하는 일상의 작은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공유경제
1인가구의 증가와 각자도생이 지침이 되는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공동체에 대한 욕구도 커지고 있다. 다수의 가구가 따로 또 같이하는 협동주거 형태인 ‘코하우징 공동체’는 전세계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공동체 단위로 생산하고 함께 소비하는 형태의 공유경제 또한 글로벌 메가트렌드로 꾸준한 확산을 거듭하고 있다.
램프증후군
중동 민담집 ‘천일야화’의 ‘알라딘과 요술램프’에서 알라딘은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램프의 요정 ‘지니’를 불러 해결한다. 현대인들은 마치 알라딘이 지니를 불러내듯 걱정 근심을 수시로 호출하고 있다. 이 같은 현대인들의 과잉근심병을 일컫는 램프증후군은 전세계적인 변동기의 불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자본주의와 공동체 가치관 등 전통적인 질서마저 흔들리고 있다.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커져가고 의지할 곳도 없다. 내일은 어떤 큰 변화가 올지 모르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미디어의 발달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재난도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황도 불안을 심화시키는 요소다.
팩트폭력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시대에 가치 있는 것은 이제 정보의 양이 아니라 ‘팩트(fact)’가 됐다. 현대사회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정보가 없는 상황에 접어들었고, 메이저 언론마저 신뢰할 수 없는 거짓과 선동의 시대가 됐다. ‘사실’에 대한 집착은 ‘인증샷’ ‘근거자료’ 제출의 상시적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팩트’와 ‘폭력’이 결합한 단어인 ‘팩트폭력’은 논쟁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정확한 통계와 증거를 내미는 대응법을 말한다.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루머와 거짓과는 대비되는 ‘반박 불가’의 사실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그만큼 불신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혐오시대
불평등과 부조리가 고착화되고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수저계급론’에서 보듯 상대적 박탁감이 사회전반에 심화됐다. 박근혜 게이트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진 민심에는 이 같은 계급적 분노 또한 배경이 됐다. 기득권은 그토록 청년들에게 ‘노오력’을 주문했지만, 특권층인 정유라는 고3 시절 단 17일 출석하고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땀흘리지 않고도 금메달을 목에 걸고 명문대에 진학했다. ‘박탈감’은 최근 몇 년 사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장 강렬한 감정으로 자리 잡았고,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더욱 심각해져갔다. 대중들은 이 감정의 원인을 서로에게서 찾았고, 여성 남성 외국인 청소년 노인 등을 대상으로 무차별적 혐오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경제적 부양 등 가부장제의 의무는 여전한데 가장으로서의 권리는 없어진 남성, 가사 육아 독박 쓰는 워킹맘, 육아도우미로 전락한 노인들 등 모든 세대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부당한 시대에 혐오와 분노만 남았다. 미국은 트럼프 당선 이후 노골적 인종차별이 극심해졌고, 영국 또한 브렉시트 이후 외국인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가 늘어나 ‘혐오’는 2016년의 가슴 아픈 글로벌 키워드기도 하다.
액티브 시니어
탄탄한 경제력을 앞세운 50~60대들이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떠오르면서 출발한 활동적인 중장년층이라는 개념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어른’의 시대로 진입했다. 보상심리가 강한 이 세대는 자신을 위한 소비에 아낌없다는 점이 이전 세대의 중장년과는 다르다. 물질주의가 강했던 액티브 시니어는 최근 모험과 봉사 등 삶의 가치를 본질적인 면에서 찾는, 단순히 동안시술을 하고 캐주얼을 입으며 젊어지는 것이 아닌 의식의 젊음을 추구하는 트렌드로 전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