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유한태 기자] 최순실 게이트의 한 줄기인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법꾸라지’라는 별칭을 가진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말년에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특히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에 실패한 특검이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부 장관에 대한 혐의 입증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조윤선 자백... “블랙리스트 김기춘이 시켰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김 전 실장의 지시로 청와대 정무수석실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에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리스트는 정부에 비우호적인 문화계 인사 약 1만명이 명단이 포함됐으며 이들을 각종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는 데 활용됐다.
CBS 노컷뉴스가 접촉한 사정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조윤선 장관은 1월17일 특검조사에서 자신이 관여한 것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이 모든 게 청와대 ‘왕실장’ 인 김 전 실장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즉 ‘공모’ 의혹에 대한 선긋기에 나서며, 일정부분 자신에 대한 혐의를 벗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특검은 이같은 진술에 따라 블랙리스트가 김 전 실장 지시로 정무수석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에서 작성돼 교육문화수석을 거쳐 문체부에 전달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똑같이 윗선의 지시를 받고 이행했다는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과 정관주 전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 신동철 전 정무비서관 등은 이미 구속됐다.
조 장관은 또한 국정조사 청문회 과정에서 위증한 혐의로 고발된 상태다. 그는 블랙리스트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취지로 진술하다 특검팀의 수사가 본격화되자 진술을 바꿔 블랙리스트 존재를 인정한 바 있다.
한편 조윤선 장관은 1월20일 문체부를 통해 보낸 문자 메시지에서 “그렇게 진술한 적이 없다”고 관련 보도내용을 부인했다.
인생 말년 최대위기 봉착한 왕실장 김기춘
박근혜 정부에서 ‘왕실장’, ‘기춘대원군’으로 불리며, 비정상적인 분권형 대통령제를 운영했던 한 축인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촛불에 휩쓸려 하루 아침에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박영수(65·사법연수원 10기) 특별검사팀은 지난 1월18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새벽까지 조사했고, 혐의입증에 상당한 자신감을 내보이며 구속영장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했다는 혐의, 문체부 1급 공무원 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 국회 국조특위로부터 청문회 과정에서 위증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과거 김 전 실장은 기민한 대응능력으로 위기를 넘겼다. 대표적으로 1992년 부산 ‘초원복집 사건’으로 이때 김 전 실장은 지역 감정 조장 발언을 해 큰 사회적 물의를 빚고 사법처리까지 될 처지로 몰렸다. 그러나 결국 발언 내용이 아니라 불법 도청을 문제삼는 ‘묘수’를 찾아내 위기를 넘겼다. 이 사건은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 측 인사들만 구속되고 김 전 실장은 무사한 채로 마무리됐다. ‘법꾸라지’로 불리는 그의 능력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순실을 모른다”던 그의 말은 이미 거짓말로 탄로가 났다. 지난해 12월7일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김 전 비서실장은 “최순실을 모른다”고 버텼지만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제시한 동영상에 발언을 번복해야 했다. 이 동영상은 당시 박근혜 캠프의 법률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 전 비서실장이 최씨의 이름이 수차례 언급되는 현장에 앉아있었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 검찰 관계자는 “특검팀이 블랙리스트뿐만 아니라 검찰이나 문화계 인사에 개입한 부분 등으로 수사를 전방위로 확대하겠다고 한 핵심은 ‘김영한 비망록’에 적힌대로 따라가 보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는 것”이라며 “비망록에서 김 전 실장이 지시한 내용대로 실제로 진행됐다면 ‘직권남용’ 혐의를 입증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 최종 책임자는 대통령?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우리 헌법이 명문으로 보장한 표현과 언론의 자유에 정면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만약 특검수사로 블랙리스트의 위헌성이 입증된다면,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헌재는 크게 △비선조직을 통한 국정농단 △인사전횡 등 대통령 권한 남용 △언론자유침해 △세월호 7시간으로 대표되는 생명권 보호의무 위반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모금 등 뇌물수수 등 5가지 쟁점으로 나누어 탄핵심리를 진행하고 있다. 다섯가지 중 하나라도 걸리면 탄핵인용 결정이 유력한 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은 이 중 언론자유침해에 해당한다.
이를 의식한 듯 특검은 그동안 블랙리스트에 대해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우리 헌법의 정신을 위반한 것”이라고 밝혀 왔다. 또한 특검팀은 “이 문제로 더 소환할 사람은 없다”며 “김 전 실장의 위에 있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정황과 물증을 계속 확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기엔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을 총괄 지휘한 혐의를 받는 김 전 실장을 넘어서 박 대통령이 최종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특검이 박 대통령에 대면 조사에 앞서, 김 전 실장에 대한 집중 추궁과 영장청구를 통한 신병확보에 주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특검팀이 블랙리스트 의혹 관련 대통령을 정조준하게 된 배경에는 김 전 실장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했다고 하더라도 최고 권력자인 박 대통령의 지시나 묵인 없이 이런 일을 벌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지적에 기인한다. 문화계 인사 1만명의 정보를 모은 뒤, 이들을 정부지원으로 통제하겠다는 발상을 하고, 실제 시행하는 일은 정권의 제2인자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고 정권 차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특히 박 대통령이 실제로 수차례에 걸쳐 ‘문화계 좌파’를 척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거나, 진보적 성향의 예술가들에게 ‘알레르기’ 증상을 보여 왔다는 점은 이 같은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일례로 박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씨에게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를 썼다는 이유로 종이한장에 불과한 축전을 보내는 일조차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국민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관련 당사자들이 국회청문회나 헌재심리 등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와 상급자에게 떠넘기기 추태 등을 보며 답답함을 느껴왔다. 그러나 아직 진행형인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수사 등 특검팀의 성역없는 수사와 노력에 시원함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이번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은 상당부분 증거와 진술을 확보한 상태고 실제 일을 한 김종덕 전 장관 등이 이미 구속된 만큼 의미있는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