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아라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으로 사상 초유의 ‘총수 부재’를 맞고 있는 삼성이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쇄신안은 정경유착의 고리 역할을 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미래전략실 해체’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미래전략실이 해체됨에 따라 삼성이 그 기능과 역할을 앞으로 어떻게 수행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삼성이 지난달 28일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을 전격 해체했다. 이준 미래전략실 부사장은 “특검이 이 부회장 등 삼성 관계자 5명에 대해 일괄 기소를 발표했다”면서 “사태가 이렇게 된 모든 책임이 미래전략실에 있음을 통감하고 미래전략실을 완전 해체한다”고 밝혔다.
현재의 미래전략실은 삼성그룹의 창업자였던 고(故) 이병철 선대회장 시절의 비서실을 모태로 이어져 오던 조직이다. 1959년부터 1998년까지 비서실, 이후 2006년까지 구조조정본부,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전략기획실이란 이름으로 운영되며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다. 2008년 삼성 특검으로 인해 전략기획실이 폐지됐지만 이건희 회장이 2010년 경영에 복귀하며 ‘미래전략실’이라는 이름으로 전략기획실을 부활시켰다.
미래전략실은 그룹 전반을 아우르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왔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논란의 대상이 돼왔다. 이 때문에 삼성은 정경유착을 근절하겠다는 의지 표명의 일환으로 미래전략실 해체를 단행하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은 미래전략실 기능을 유지하는 어떤 조직도 두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계열사 자율 경영 체제 전환
정부·국회 담당 대관조직 폐지
삼성은 미래전략실 해체와 함께 최지성 실장(부회장)과 장충기 차장(사장) 및 팀장 5명 전원이 사퇴한다는 내용 포함, 계열사의 자율 경영 체제 전환 등을 담은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쇄신안에 따라 8개팀(전략1팀 전략2팀 경영진단팀 기획팀 커뮤니케이션팀 인사지원팀 금융지원팀 준법경영팀)에 속한 200여명의 미래전략실 직원들은 계열사 곳곳으로 흩어져 재배치된다.
미래전략실이 주관해왔던 수요사장단회의도 폐지된다. 사장단회의는 매주 수요일 계열사 사장들이 참석해 전문가 강연을 듣고 주요 현안을 공유하는 자리다. 사장단회의의 폐지로 향후 삼성 계열사는 그룹 차원의 ‘가이드라인’보다는 대표이사와 이사회를 중심으로 자율 경영을 하게 될 전망이다. 그룹 차원에서 진행해왔던 채용은 올해 상반기까지만 유지하고 하반기부터는 계열사별로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경유착 근절을 위해 정부와 국회를 담당하던 대관 조직을 없애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간 삼성그룹 차원에서 진행된 정치권과 법조계 등을 대상으로 한 미래전략실의 대관 업무는 정경유착의 핵심으로 지적되며 비판을 받아온 바 있다. 앞으로는 각 계열사의 판단에 따라 대관 업무를 스스로 결정, 진행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에 대해 한 재계 관계자는 “미래전략실의 대관 업무가 그간 불법적인 정황이나 의심 소지 등을 불러일으키는 일의 중심이 돼 왔던 게 사실”이라며 “이번에 미래전략실 해체와 함께 대관 업무 방향에도 주목이 쏠리는 만큼, 대관 조직 해체라는 초강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이밖에 10억원이 넘는 외부 출연금과 기부금 등 후원금에 대해서는 이사회 의결을 거치도록 규정을 바꾼다. 규정 변경은 각 계열사별 주주총회에서 의결을 거쳐 진행될 예정이다. 지금까지는 삼성 계열사 이사회가 아닌 경영위원회에서 외부 후원금 등의 집행 여부를 결정해 왔으며, 자기자본의 0.5%(약 6800억원) 이상(특수 관계인은 50억원 이상)인 경우에만 이사회를 거치도록 했었다.
이번 쇄신안은 이 부회장이 지난해 12월6일 열린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해 미래전략실 해체를 약속한 데 따라 마련됐다. 이날 이 부회장은 “미래전략실에 관해 정말 많은 의혹과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는 걸 느꼈다”며 “창업자인 선대회장이 만든 이후 유지된 것이라 조심스럽지만 부정적 인식이 있다면 없애겠다”고 말한 바 있다.
“정경유착 근절 의지” vs “경영 전반 혼란 가중”
삼성의 경영쇄신안에 대해 재계는 다소 엇갈린 반응을 내놓고 있다. 정경유착을 근절하겠다는 단호한 쇄신 의지를 보인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이 부회장의 부재와 더불어 미래전략실까지 해체되면서 경영에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의 대표격인 삼성이 이번처럼 강력한 쇄신안을 내놓은 것 자체가 정치권과 외압 등의 단절을 선언하는 강력한 신호로 (다른 기업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며 “불법적인 정황이나 요청 대상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정경유착을 막겠다는 의지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이에 반해 그룹의 컨트롤타워가 없어지면서 경영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미래전략실이 그룹의 핵심으로 사회공헌과 종합 채용 업무 등을 해왔는데 모두 붕 떠버려 경영 전반에 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며 “좋은 의미에서의 그룹 활동들을 고려하면 차후 문제들을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삼성이 총수 부재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그룹의 중심을 잡던 미래전략실까지 해체하며 경영난이 가중되는 모습”이라며 “관리의 조직으로 유명한 삼성인 만큼 계열사별로 빠른 시일 내 기획·대관 등 종합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해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