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자존감’이 화두다. 윤홍균 정신과 의사의 자존감 트레이닝법을 담은 ‘자존감 수업’이 베스트셀러로 서점가를 장악한 이후 ‘자존감’이란 타이틀을 단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같은 열풍에 힘입어 등장한 관련 강연 등 각종 프로그램들도 2030에게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경쟁 속 고독한 개인의 해법 찾기
왜 ‘자존감’인가? 일단, ‘나’에 대한 관심의 증가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의 행복, 개인의 존재에 대한 집중이 강한 시대인 만큼, ‘자존감’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인 요건이 된 것이다. 또한 장기불황과 양극화, 철저한 계급시대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고독한 개인의 해법 찾기이기도 하다.
상반기 ‘자존감’ 관련 서적 트렌드에 대해 온라인 서점 ‘예스24’ 관계자는 “미래에 대해 갈피를 잡기 어려운 현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세우고 상처받은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개인의 정신적 치유’ 관련 에세이들은 꾸준히 인기가 상승하고 있다. 에세이 중 에서는 명상과 치유를 주제로 한 에세이의 판매가 전년 상반기 대비 135% 이상 급증했고, 자기계발서 분야 내 처세술 삶의 자세를 다룬 도서들은 전년 대비 20% 이상 판매가 늘었다.
특히 이전 세대들에 비해 어린 시절부터 존중받고 자라온 청년세대는 사회에서 자존감의 훼손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종 조사에 의하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높게 생각하며 자기 확신이 강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경향도 높지만, 반대로 이 같은 높은 자존심이 지켜 지지 않는 현실 앞에 정신적 황폐를 경험하는 청년세대도 같은 비율을 차지했다.
박탈감 느끼는 청년들
현재 청년빈곤은 전 세계적 문제다. 실업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상황이 ‘청년’의 현주소다. 통계청 가계동향에 따르면 청년층 가운데 29세 이하 가구의 지난해 3분기 소비지출은 205만742원으로 5년전 201만4451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5년간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9%를 넘은 것을 고려할 때 사실상 청년층의 소비지출은 크게 준 것으로 분석된다.
사회 진출 전부터 대학등록금 때문에 빚을 떠안고 졸업 후에도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다 생활자금이 부족해 또 다시 대출을 받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년층도 적지 않다. 이들은 주거 음식 노동 모두 비인간적 환경에 처해 있다.
문제는 청년들의 삶도 부모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극심한 양극화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수저계급론’이다. ‘수저계급론’은 역설적으로 청년세대가 ‘계급’에 대해 얼마나 절망적이고도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계급’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이전 세대보다도 그 격차와 구조를 받아들이기 힘든 세대인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1980~2000년 사이 태어난 ‘밀레니엄세대’들은 경제적 빈곤 속에서도 자존감을 지키는 경향이 강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의 행복을 중요시하고, 그 행복을 ‘돈’ ‘권력’ 등 이전 세대의 기준과 다른 곳에서 찾는 사고방식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평가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형태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트렌드와 소비에 민감하고 그것을 통해 소통하는 데 익숙한 세대인 만큼, 남과의 비교와 경쟁에서 벗어난 인간관계에 서툰 것이다. 과시형 소통에 대한 반감은 크지만, 타인의 ‘자랑질’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기도 힘들다. 이들이 ‘인맥 컷팅’을 하고, ‘혼자’를 자처하는 것은 어쩌면 이 같은 이중적 상황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나름의 방안이다.
불평등이 낳은 자존감의 결여
어쩌면 이 모든 것은 SNS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자신의 소비활동에서부터 사소한 경험들을 타인과 공유하는 SNS 문화는 ‘자존감’에 가장 위협이 되는 환경이다. 아르바이트 전문포털 ‘알바천국’의 조사에 의하면 자존감이 낮다고 대답한 40.6%의 20대 중 가장 많은 수가 ‘행복해 보이는 지인들의 SNS를 볼 때’가 ‘가장 자존감이 낮아지는 상황’이라고 답했다. SNS에 도배되는 타인의 과시적 소비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그럴수록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이 보다 직접적으로 시각화돼 일상적으로 느끼게 되는 구조에 원인이 있다. 사회학자 예란테르보른은 ‘불평등은 굴욕 굴종 소외 빈곤 무기력 스트레스 불안 근심 자존감의 결여를 낳는다’고 말했다. 결국 자존감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계층사회에서 위협받는 것이다. ‘갑’의 횡포로 얼룩진 숨죽인 ‘을’들의 사회에서 ‘이 악물며 버티기’는 한국인들의 오랜 역사기도 하다. 이같은 문화권에서 ‘자존감’이란, 이전 세
대에서 정의되고 챙길 여유가 없었을 뿐 오래전부터 가장 한국적 결핍을 표현한 단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학자 허태균씨는 급속한 경제발전 뒤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든 한국인의 상태를 사춘기 청소년에 비유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대부분의 청소년들 부모 친구 사회와의 갈등을 경험하고 자존감의 위기, 불안, 우울감 등을 호소한다.” 문화평론가 이수미씨는 “부당한 일을 반복적으로 견뎌내면서 응어리진 감정, 한이나 화병 등으로 표현됐던 그런 감정이 전통적 정서라는 것은 자존감 억압의 전통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말해준다”며,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감정적 힘을 기른다는 점에서 자존감 트렌드는 긍정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