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김희선, 김선아 주연의 JTBC 금토드라마 ‘품위있는 그녀’는 ‘막장의 기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이 드라마는 방영 전부터 ‘막장’ 타이틀이 붙을 만큼 자극적 시놉시스를 갖고 있다. 하지만 ‘막장’의 상징으로 치부돼 왔던 지상파의 일일드라마와는 다른 신선함을 갖추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품위있는 그녀’는 고급화된 또 하나의 막장드라마 또는, 그 진화일까?
불륜 재벌 음모 범죄 신분상승... ‘막장’의 요소
대중들이 ‘막장’이라고 하면 흔히 연상하는 코드들이 ‘품위있는 그녀’에 집대성 돼 있다. 불륜 재벌 음모 범죄 신분상승... 어쩌면 여기에 복수까지 있을지도 모른다. 거의 매 장면이 자극과 파격이다.
제작진 또한 이 같은 점을 의식해 연출의 세련미에 공을 들였다. 김윤철 PD는 제작발표회에서 “아침드라마 같다”는 취재진의 지적에 “세트 미술 패션 등을 아침드라마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연출가의 설명에 대해 드라마 시작 전 언론들은 ‘화려하게 겉포장을 했지만 결국은 막장’이라는 예측 기사를 쏟아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체 막장은 무엇인가? 연기나 세트 등이 유치하면 막장인가? 등장인물들이 핏대를 올리며 소리치고 뺨 때리며 싸워대고 재벌 사모님과 신분 상승하려는 등장인물들이 갈등하고 음모를 꾸미는 소재가 연쇄적으로 등장하면 무조건 막장인가?
평론가들은 흔히 ‘개연성 없는 전개’를 막장의 특징으로 꼽는다. 그래서 2013년 방영한 MBC주말드라마 ‘백년의 유산’의 주인공을 맡았던 유진은 출연작이 ‘막장’이라는 비난에 대해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현실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라고 인터뷰를 했다. ‘개연성’의 합리화를 시도한 것이다. 며느리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시어머니가 등장하는 ‘백년의 유산’ 속 설정 같은 황당한 사건이 현실에 더 많다는 점은 대중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개연성’은 실화를 재연한다고 해도 인과관계가 전개에 드러나지 않으면 실종되는 성질의 것이다. 현실에 그것이 얼마나 빈번하게 존재하는가는 ‘개연성’과 하등 관련이 없다. 외계인이나 귀신, 초능력자가 등장한다고 해도, 심지어 대체역사물까지도 대중이 그것을 ‘막장’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다.
선악대립의 세계관이 가진 문제
백미경 작가는 ‘품위있는 그녀’ 집필 방향을 이야기하면서, ‘선과 악’의 명확한 이분법을 ‘막장’의 한 요소로 보는 듯한 암시를 했다. 2014년 방영한 MBC ‘왔다! 장보리’를 예로 들면서 애초부터 시청자가 미워할 캐릭터와 사랑할 캐릭터가 정해져 있는 부류의 드라마와 차별점을 강조했다.
‘품위있는 그녀’는 중산층의 어두운 일면을 코믹하게 묘사한 미국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을 여러모로 연상시킨다. 상류층 주부들의 화려한 패션과 외모, 인테리어 등의 볼거리는 물론, 나레이션 음악 연출 모든 면에서 그렇다. 심지어 이들의 어둡고 천박한 일면을 코미디와 스릴러 등을 섞어 풀어가는 방식 또한 판박이다.
‘위기의 주부들’이 그랬듯 이 드라마는 자극적이지만, 선과 악이 명확치 않을 뿐만 아니라 계층적 스테레오 타입도 거부한다. 선악대립이 꼭 ‘막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막장’에서 선악대립이 부정적인 이유는 인간을 자아와 타자로 나누고 타자를 이해할 필요도 없는 절대 악으로 분류한다는 데 있다. 문화평론가 이수미씨는 “악랄한 남이 착한 나를 괴롭혀서 모든 문제가 일어나는 막장드라마의 세계관은 무의식적으로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보게 한다. 이 같은 시각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결핍돼 있기 때문에 반복 노출되면 시청자는 정서적 피폐함을 느끼게 된다”고 비판했다.
문화평론가 문재용씨는 “타자를 가해자로, 자아를 피해자로 규정짓는 방식으로 내재된 상처를 극복하려는 무의식이 막장드라마를 시청하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반사회적 욕망의 규범적 포장
‘막장’의 불편함은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묘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묘사가 관음적이거나 편승적일 때, 즉 대중의 은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작용으로 드라마가 존재할 때 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침드라마의 나쁜 시어머니가 권력의 욕망을 숨긴 수많은 현실 시어머니들의 길티플레져라던가, 주부인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연하남의 애정공세가 시청자의 금지된 욕망의 대리만족 도구일 때다.
통상 ‘막장드라마’에서 재벌의 존재도 이 같은 역할이다. 결혼을 반대하는 예비 시어머니 등으로 형상화된 재벌은 서민을 억압하는 혐오의 존재로 그려지는 반면, 주인공을 구제하는 남자 주인공인 재벌은 상류층에 대한 대중의 동경을 반영한다.
이 불량식품 같은 ‘부끄러운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막장드라마’의 소비 심리다. 욕망 충족 뒤에 동반되는 불편한 감정을 무마하기 위해 가부장제에 충실한 캐릭터에게 포상을 준다거나, 악이 벌 받는 등의 지배이데올로기의 도덕과 질서를 강조하는 메시지로 포장하는 것은 마치 ‘포르노’의 구조와 같다. 반사회적 욕망의 규범적 포장인 셈이다.
‘가족드라마’라고 주장하는 지상파의 많은 아침드라마는 이처럼 전통적 질서를 강조하고 도덕 교과서적인 인물을 내세우면서 은밀하게 물신주의와 외모지상주의, 학력 직업 성별 등에 대한 각종 편견과 차별주의를 확대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막장’이다.
반면, ‘품위있는 그녀’가 특히 막장과 차별되는 결정적 지점은 사회적 편견을 깨고 주류를 조롱하는 전복적 메시지다. 드라마에서 반복되는 ‘막장의 시퀀스’들은 반사회적 욕망의 비밀스러운 충족이 아니라, 상류층의 본질 자체가 ‘막장’이라는 분명한 조롱이다. 등장인물들은 성형수술 불륜 신분상승 등에 집착하는 허영적 삶을 살지만 이들의 삶은 한심하고 웃기며 공허하고 슬프게 묘사된다.
문화평론가 이씨는 “지상파가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극적 요소를 줄이고 있지만 ‘막장’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드라마가 많다”며 “시청자의 건강한 가치관과 비판의식이 요구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