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아라 기자] 오는 7일 한국을 방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거론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FTA에 대한 불만을 지속적으로 표출해온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탈퇴하는 등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노선을 명확히 하고 있어 한미 FTA를 폐기하겠다고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 당장 FTA 폐기를 원치 않더라도 미국 측의 유리한 재협상을 위해 FTA 폐기 카드를 꺼내들 가능성도 있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달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2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를 열고, 한미 FTA 개정 협상에 착수하기로 사실상 합의했다. 우리 측은 통상절차법에 따라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하고, 이후 공청회를 개최해 의견을 수렴한 뒤 통상조약 체결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이에 따른 공식 개정협상 개시는 내년 초에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韓美 입장차 여전
하지만 이번 협상이 ‘한미 FTA가 양국에 균형적인 경제 이익을 가져다주는 방향’으로 개정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미 FTA에 대한 양국의 입장차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우리 측은 “한미 FTA로 양국이 이익을 보고 있다”는 입장인 반면, 미국 측은 “한미 FTA로 인한 미국의 적자가 심각해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지난달 23일 열린 ‘제1차 한미 민관합동 경제포럼’에서 조현 외교부 2차관은 한미 관계에 대해 “군사 동맹에서 출발해 FTA 발효로 경제 동맹으로 발전했으며 성공적인 협력 모델을 만들어왔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마크 내퍼 주한미국대사 대리는 “한국과의 교역에 있어서 미국의 적자가 심각하다. FTA 이후로 적자가 2배로 늘어났다”며 “이 문제를 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마커스 놀랜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부소장 또한 “교역 정책의 목표가 국가 수입을 늘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 한국은 FTA가 준 기회들을 미국보다 잘 포착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한미 FTA가 미국보다 한국에 경제적 이익이 됐다는 의견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NAFTA 대신할 희생양?
한미 FTA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재협상’ 논란이 꾸준히 제기돼 오다가 최근 들어서는 ‘폐기’까지 거론되고 있다. 한미 FTA가 트럼프 대통령 대선 공약인 ‘아메리카 퍼스트’의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당초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폐기를 통해 ‘아메리카 퍼스트’를 부각시키려던 트럼프 행정부가 NAFTA에서 한미 FTA로 눈을 돌렸다는 것이다.
지난달 11일(현지시간) 미국 온라인매체인 ‘더 데일리 비스트’는 지난 4월께 백악관 회의에서 “NAFTA를 철회하는 대신 한미 FTA 공격 쪽으로 초점을 맞추는 게 어떻겠느냐”는 피터 나바로 백악관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의 조언을 트럼프 대통령이 수용했다고 보도했다. 나바로 위원장은 한미 FTA를 잘못된 자유무역협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으며 부정적 입장을 밝혀왔던 인물이다.
이 매체 소식통들의 전언에 의하면 당시 백악관 회의에서 참모들은 NAFTA 폐기 대신 재협상을 권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NAFTA 폐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나바로 위원장이 이 같은 의견을 제시했던 것.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FTA 폐기 주장이 정책적 고려나 국제관계의 파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충동적으로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27일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NAFTA를 폐기할 준비가 됐었으나 ‘즉각 폐기’ 대신 ‘재협상’을 선택했다. 만일 NAFTA를 폐기하면 6개월 후에 효력이 발생하지만 한미 FTA는 폐기하는 즉시 끝장”이라며 NAFTA보다 한미 FTA 폐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FTA 폐기, 실체적이고 임박한 위협”
美의회 반대 분위기… “트럼프 의지가 중요”
우리 정부는 “한미 FTA 폐기는 한국과 미국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미국 측에서 폐기를 주장할 가능성도 있어, 이에 대한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는 방침이다. 워싱턴을 방문했던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13일(현지시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미 FTA가 양국 간 호혜적으로 작동한 점에서 폐기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드시 타결점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FTA 재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따라 ‘FTA 폐기’가 미국 측의 단순한 엄포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같은 날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미국 정·관·업계 관계자를 접촉한 결과, 한미 FTA 폐기가 실체적이고 임박한 위협임을 확인했다”며 “개정에 진전이 없을 경우 미국 측의 폐기 절차 돌입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의회 내에서는 ‘폐기 반대’ 목소리가 큰 것으로 전해진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 상·하원 의원과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만났는데 한미 FTA를 지지하고 있었고, 폐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며 “안보와 경제 등을 이유로 한미 FTA는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을 들었다”고 밝혔다. 앞서 워싱턴을 방문했던 국회 동북아평화협력 의원외교단 단장인 정동영 국민의당 의원 또한 “미국 의회는 FTA를 유지해야 한다는, 폐기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미국 의회에서 한미 FTA 폐기를 반대하더라도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을 부각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가 큰 만큼, 미국 측이 한미 FTA 폐기 카드를 꺼내들 가능성은 여전하다. 의원외교단으로 방미에 참여했던 정병국 바른정당 의원은 “워싱턴에서 느낀 것은 (한미 FTA가) 폐기로 간다는 분위기”라며 “미국에 있는 의원들조차 트럼프 대통령에게 편지로 한미 FTA 폐기만은 안 된다는 주장을 편다고 한다”고 말했다.
한미 FTA에 대해 놀랜드 PIIE 부소장은 “미국에서는 NAFTA, FTA 등을 철회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이 갖고 있다. 한미 FTA에 대해서도 트럼프 행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면서도 “다만 어느 대통령이든 의회 의견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를 무조건 철회하겠다고 할 경우, 이에 대한 리스크가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