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아라 기자] 올해 4월3일은 ‘제주4·3사건’의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3일 미군정의 강압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계기로 제주도에서 발생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가장 컸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70년 전 제주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3년 정부에서 발행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내용과 이후 보완된 자료들을 간추려 정리한 제주4·3평화재단의 ‘제주4·3 바로알기’에 따르면, 4·3사건은 미군정기인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시작으로 1948년 ‘4·3 무장봉기’가 일어나며 확산됐다.
‘3·1절 발포사건’은 미군정의 정책 강행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불만과 경제적 어려움이 중첩된 상황에서 1947년 3·1절 기념행사 가두시위 도중 경찰의 총격으로 주민 6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말발굽에 치여 다친 어린아이를 기마경찰이 그대로 두고 간 것에 대해 관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무장경찰들이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도내 민심이 극도로 악화됐으나 미군정과 경찰은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 같은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좌익진영이 폭로하고 나선 데 이어 제주에서 민·관 총파업이 진행됐다. 미군정은 북조선과의 통모로 이번 사건이 발생했다며 제주도를 ‘빨갱이섬’으로 조작하고 탄압을 이어갔다.
이후 1948년 1월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명백해지자 남로당이 5·10 단독선거 거부를 주된 명분으로 내걸고 1948년 4월3일 도민을 탄압하던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공격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5월10일 무장대의 투표소 공격과 이에 동조한 다수 주민들의 선거 거부로 인해 제주도 선거구 3개 중 2개가 과반수 미달로 선거가 무효 처리됐다.
이승만 정부 집권 후 중산간마을에 대한 토벌대의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인 ‘초토화작전’으로 참혹한 집단 살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이 도피 입산하게 됐고, 수많은 주민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무장대가 일부 마을에 대한 보복 습격을 감행하면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남녀노소 무차별 학살
4·3사건은 7년여에 걸쳐 관련 사건이 지속되면서 제주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5000~3만여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며 가옥 4만여채가 소실됐다. 중산간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고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과 각종 산업시설도 파괴됐다.
1954년에야 사건이 종료돼 폐허가 된 마을의 복구와 정착사업이 진행됐으나 4·3사건이 제주공동체에 남긴 후유증은 오랜 기간 이어졌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옭아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콤플렉스(공산주의에 대한 과민반응) 등 정신적 피해 또한 컸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2014년 5월23일까지 실시한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심사에서 인정된 희생자와 유족의 수는 각각 1만4231명, 5만9225명에 달한다. 희생자는 △사망자 1만245명 △행방불명자 3578명 △후유장애자 163명 △수형자 245명 등이다. △21~30세 희생자가 5461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11~20세(2464명) △31~40세(2291명) 희생자가 다수를 차지한다.
희생자들은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 84.3%(1만2000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2.3%(1756명)로 구성돼 있다. 전체 희생자 중 △10세 이하 어린이가 5.4%(770명) △61세 이상 노인 6.3%(901명) △여성이 21.1%(2990명)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작전이 전개됐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