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위기에서 회복하는 능력은 민주주의 국가가 융통성 없는 전제국가들보다 뛰어나다. 하지만 이는 한편으로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될 것이라는 자만으로 발전해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은 지난 백 년간 위기의 순간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같은 패턴을 증명한다.
위협에 걸맞은 대응을 하지 않아 존속
민주국가들에는 스캔들과 재앙, 위기가 끊이지 않는데 어느 순간 보면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그런 작은 실패와 위기들이 민주주의가 정도를 걷는 방식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거의 2년을 이어져 온 미국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1974년 절정에 달했다. 범죄 혐의가 확실해지고 탄핵이 가까워 오자 결국 닉슨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 했다. 모든 스캔들이 그렇듯 ‘위기’에 관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주주의가 발가벗겨지고 썩은 밑동이 드러난 것 같았다.
1974년 5월, 서독에서는 빌리 브란트가 최측근 비서가 동독 간첩으로 밝혀져 사임했고, 이탈리아에서도 총리 루모르가 뇌물 수수 및 부패 혐의로 물러났으며, 일본에서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토건 비리와 록히드 사로부터의 뇌물 수수, 불륜 스캔들로 물러났다. 당시만 해도 이들 국가는 재앙적 상황으로 보였다. 하지만 무너진 민주국가는 없었다. 모든 스캔들에서 지도자가 물러나는 과정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진행됐다. 이런 절차는 민주주의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불만과 불안의 배출구가 됐다.
런시먼에 따르면 민주국가들은 심각한 위협에도 결코 긴급조치 선포나 체체 전환 등 그 위협에 걸맞은 수준의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살아남았다. 반면, 당시 체제를 뒤흔드는 진정한 위기가 꿈틀대고 있던 곳은 바로 자신들의 실패를 자백하지 못하던 공산주의 정권들이었다. 당시 불만을 덮어버린 동유럽 공산권은 1989년 폴란드 공산정부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뒤 1990년대 초반까지 모두 붕괴되고 말았다.
2008년 경제 위기는 대표적 사례
위기와 위기 극복, 그리고 현실 안주가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런 패턴을 알고 있는 데서 ‘현실 안주’의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결국은 다 잘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진짜 나서야 할 때를 잘 구분할 수 없고, 또 정작 그럴 때 행동하지 못한다. 24시간 내내 ‘위기’라고 외치는 미디어와 각종 불협화음들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바로 이 같은 ‘안주의 덫’으로 인해 얼마나 큰 위기를 맞았는지를 결정적 이고 역사적 순간들로부터 확인시킨다. 2008년 경제 위기는 대표적 사례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버냉키의 전공은 대공황이었다. 자신들은 이미 대공황의 교훈으로 그것을 피할 방법을 알고 있다고 자만했지만 2008년 위기가 닥쳤다. 과거의 교훈은 오히려 현실에 안주하게 한 것이다.
저자는 트럼프의 등장도 민주주의의 본질, 즉 미친 듯 날뛰는 분노와 태평스러운 현실 안주가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말한다. 민주국가에서 사람들은 흔히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즉, 자신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모욕을 퍼부어도 체제가 견뎌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던진 표는 체제에 대한 넌더리를 표현하는 동시에 체제에 대한 자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책에 민주주의가 어떻게 자만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매뉴얼은 없다. 실제 그가 분석하고 있는 실패 사례들은 모두 지름길로 가고자 했다가, 중간 단계를 뛰어넘으려 했다가, 좀 더 빨리 가고자 요령을 부렸다가 실패한 사례들이다. 어려움을 안다고 완벽한 조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게 낫다”고 저자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