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수정 기자]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66) 전 대통령이 항소심 법원에서 보다 무거운 형을 받았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 핵심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권을 최대한 강화하기위해 박 전 대통령에게 승계작업과 관련, 묵시적인 청탁을 한 것으로 볼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풀려나왔지만 대법원 판결을 앞둔 이 부회장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판사 김문석)는 24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혐의로 기소된 박 전 대통령의 항소심에서 징역 25년에 벌금 200억원을 선고했다. 앞서 1심은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에 벌금 180억원을 선고했다. 1심보다 징역 기간은 1년, 벌금액은 20억원 늘었다. 박 전 대통령의 특가법상 뇌물수수 유죄 혐의가 추가됐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삼성 뇌물 관련 죄목은 최순실(62)씨와 공모해 △2015년 7월부터 2016년 3월까지 이재용(51) 삼성전자 부회장으로부터 그룹 경영권 승계 등을 도와달라는 부정한 청탁을 받고 최씨가 설립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지원금 명목으로 16억2800만원을 지급하게 한 혐의 △2015년 7월부터 2016년 1월까지 같은 명목으로 미르재단(125억원), K스포츠재단(79억원) 출연금을 공여하도록 한 혐의(이상 특가법상 제3자 뇌물수수)로 이뤄진다.
재판부는 이날 박 전 대통령에 제기된 18개 혐의 중 '삼성 뇌물' 관련 혐의에 대해 무죄로 본 1심과 다르게 판단했다. 이에 앞서 1심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최씨와 공모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부터 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정한 청탁을 받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와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 지원 관련 뇌물 혐의도 무죄로 판단했다. 1심은 "제출된 증거들만으로는 당시 삼성의 개별 현안들 진행 자체가 '승계작업'을 위해 이뤄졌다거나, '이재용의 안정적 경영권 승계'라는 목표를 위해 추진됐음을 인정하기 부족하다"며 모두 무죄로 봤다. 해당 범죄행위 기간 중 삼성에서 이 부회장의 승계작업이 있다고 볼 수 없고, 이에 따라 '그룹 승계 도움'이라는 기본 전제가 소멸되기 때문에 뇌물죄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정치와 경제 관련 부도덕한 거래"
그러나 2심 재판부는 "포괄적 현안으로서의 승계작업이 존재했다"며 1심과는 달리 '기본전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승계작업은 그 성질상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제도적·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구체적 내용이 유동적일 수 밖에 없다. 이재용으로서는 미래전략실을 통해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들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권을 최대한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에 따른 지배구조 개편을 진행해왔다"고 밝혔다. 이 중 영재센터 지원과 관련해 "삼성 이재용의 승계작업 부정청탁이 인정된다"며 유죄를 인정했다. 다만 재판부는 미르·K스포츠재단 지원에 대해서는 "삼성그룹은 통상적인 공익활동 일환으로 생각하고 출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1심처럼 뇌물이 아니라고 봤다.
재판부는 이어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2015년 7월25일 단독 면담을 앞두고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실에서 정리한 말씀자료에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 등이 기재돼 있는 점 등을 근거로 "승계작업과 관련한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고도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같이 삼성 관련 뇌물죄가 인정된 반면 유죄에서 무죄로 바뀐 혐의는 포스코그룹에 대한 펜싱팀 창단 요구(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및 강요) 1개에 불과했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위임받은 막강한 권한을 이용해 최순실씨와 공모해 재단 출연과 금전 지원, 채용승진까지 요구했다.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해 기업의 재산권과 경영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기업 총수와 단독면담이라는 은밀한 방법으로 삼성과 롯데에서 150억원 넘는 뇌물을 받고, SK에 89억을 요구했다. 공무원의 직권남용과 강요를 동반하는 경우 비난이 훨씬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뇌물과 관련해 기업 총수에게서 부정한 청탁을 받기도 했다. 정치와 경제 관련 부도덕한 거래는 민주주의 기본질서를 훼손하고 시장경제를 왜곡해 국민들에게 심각한 상실감과 깊은 불신을 안겨줬다"고 비판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으로 초유의 탄핵 사태를 맞이했고, 그 과정에서 사회 전체가 입은 고통을 헤아리기 어렵다"면서 "그럼에도 박 전 대통령은 범행 모두를 부인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안보였고, 오히려 최씨에게 속았다는 등 변명을 하며 책임을 전가했다"고 질타했다. 더욱이 재판부는 "정당한 이유 없이 법정 출석을 거부해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기 바라는 국민들의 마지막 여망마저 저버렸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이 부회장 상고심에 불리하게 작용할까
2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1심 재판부처럼 삼성의 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을 묵시적 청탁과 함께 건넨 뇌물로 판단했다.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금 부분도 이 부회장의 1심 판결처럼 대가관계 등에 비춰 뇌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미래전략실을 통해 그룹 지배권을 강화하는 등 승계 작업이라는 포괄적 현안을 두고 있었고 박 전 대통령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봤다. 정부에서 삼성의 경영승계에 우호적인 조처를 했다는 점에서 경영권 승계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며 묵시적 청탁의 존재도 인정했다. 대가관계가 인정돤 동계스포츠영재센터의 후원금은 뇌물이지만 부정청탁과 함께 전달된 돈으로 보기 어려운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은 뇌물이 아니라고 봤다.
이날 2심 재판부가 인정한 뇌물 액수는 대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간 이 부회장의 유·무죄 인정 범위나 형량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이 부회장 측과 삼성그룹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부회장의 2심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마필 구매대금과 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이 다시 뇌물로 인정됐다는 점을 상고심이 어떻게 받아들이지 관심이 모아진다. 재판부가 삼성 뇌물사건을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부도덕한 거래"라고 규정하면서 이 부회장을 사실상 국정농단 범죄의 공범으로 지목한 것과 다름없다는 점도 본인과 삼성그룹 측에는 뼈 아픈 대목이다.
이 부회장은 공금을 횡령해 삼성의 승마 지원금과 재단·센터 지원금을 만들고 재산을 국외로 도피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이 부회장의 1심에서는 횡령액을 뇌물액과 같은 89억여원으로, 2심에서는 36억원으로 인정했다. 박 전 대통령 2심 재판부의 판결에 따르면 이 부회장의 뇌물 관련 혐의 액수는 약 87억원이 된다. 이대로 확정되면 형량이 가중된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죄의 양형에서 50억원이 넘어가면 '3년 이상의 징역'에서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높아진다. 집행유예로 풀려나오기 어렵게 된다는 얘기다.
박 전 대통령 복역기간 32년으로 늘어나
이번 판결로 박 전 대통령의 복역 기간은 총 33년으로 늘어나게 됐다. 이전까지 박 전 대통령 형량은 국정농단에 국정원 특수활동비 수수(특가법상 뇌물·국고손실)와 공천개입(공직선거법 위반) 위반 혐의 1심에서 나온 각각 징역 6년, 2년을 더해 32년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도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 10월16일 구속기간 연장에 불만을 품고 재판 보이콧을 선언한 후 줄곳 출석하지 않았다.
안종범 전 수석은 형량 가벼워져
한편 재판부는 이어 열린 최순실 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최씨에게 징역 20년·벌금 200억원·추징금 70억5281만원을, 안 전 수석에게 징역 5년·벌금 6000만원·추징금 1990만원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최씨에게 징역 20년·벌금 180억원·추징금 72억9427만원을, 안 전 수석에게 징역 6년·벌금 1억원·추징 4290만원을 내린 바 있다.
재판부는 안 전 수석 감형 이유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점, 대부분 범행이 대통령 지시에 의한 것이고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점, 1심이 유죄로 인정한 일부 뇌물수수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 점, 사건 실체 파악에 상당한 도움을 준 점 등을 손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