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오주한 기자] 오는 28~29일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리는 G20정상회의에서의 한일정상회담이 무산될 전망이다. 일본 현지언론이 보도한데 이어 청와대도 이를 재확인했다.
24일 교도(共同)통신은 외교소식통을 인용해 일본 정부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일정을 이유로 한일정상회담 불가 입장을 문재인 정부에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통신에 “(한일정상회담) 개최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며 “문 대통령 측이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등) 방침을 바꾼다면 모르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보류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아베 총리가 문 대통령과 ‘서서’ 대화를 나눌 가능성은 있다”고 했다.
통신은 “한국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해 일본이 수용할만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문 대통령에 대한 (일본 정부의) 불신이 커졌다”고 전했다. 작년 우리 대법원은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일본 측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위반이라고 반발했다. 일본은 박근혜 정부 때 체결돼 위안부 피해자 보상금으로 10억엔(약 100억원)을 출연한 화해치유재단을 문재인 정부가 해산한 것도 외교결례라며 문제시하고 있다.
한일정상회담 무산은 25일 청와대가 재확인했다. 고위관계자는 이날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G20정상회의 기간에 한일정상회담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한일관계 악화를 두고 여론은 찬반으로 엇갈린다. 일부는 일본에게 식민지배 청산을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일부는 일본에 대한 감정적 대응으로 인해 경제·안보 측면에서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서태평양에서는 현재 한국, 미국, 일본, 호주, 인도를 잇는 ‘다이아몬드 안보 동맹’ 형성이 추진되고 있다. 이는 오바마 행정부의 리밸런스(Rebalance. 아시아 중시) 정책에 이어 인도·태평양전략(FOIP)을 구상 중인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3각 군사동맹에 맞서기 위함이다.
아시아 대륙 끝에 붙어 있는 한반도는 중국 등을 감시할 레이더를 설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전면전 등 유사시에는 중국 등에 지상군을 투입할 수 있는 전략거점이다. 1950년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을 설정하고 한반도를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했던 미국이 6.25 발발 후 한국에 부랴부랴 대규모 지원군을 급파한 까닭이다.
그러나 한일관계 악화로 인해 FOIP에는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일본 요미우리(読売) 신문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4월 11일 미국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에게 한일관계 개선을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한일관계가 진전되지 않을 경우 최악의 상황에서는 한국이 FOIP에서 ‘배제’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은 애치슨라인 설정 사례에서도 보듯 한국에 비해 일본을 상대적으로 우선시하는 성향이 있다. 한일갈등에서 한국보다는 ‘일본 손’을 들어줄 여지가 높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다수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는데 동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는 ‘골프 단독회담’ 등 친분을 표시하고 있지만 문 대통령과는 ‘2분 단독회담’ 등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실상의 ‘신(新) 냉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자유진영에서 ‘왕따’가 돼 범공산진영에 합류할 경우 홍콩 시위에서 보듯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위협받게 된다. 문 대통령은 ‘중국몽(中國夢)’ 동참을 선언한 바 있다. 최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코리아 패싱’ 후 북한을 전격방문하는 등 범공산진영 합류 가능성도 불분명하다. 동서진영 모두에서 ‘버린 카드’가 될 경우 한국은 홀로 중국, 러시아, 북한의 거대한 군사력 앞에 노출된다.
한일관계 악화는 우리에게 경제적으로도 이로울 건 없다. 13일 한국경제연구원 발표에 의하면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이후 올해 1분기 일본의 대한(對韓) 투자는 6억3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6.6% 감소했다. 같은 기간 일본의 해외직접투자는 1015억9000만 달러로 167.9% 늘어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21일 부산대 김현석 교수팀이 용역연구한 ‘일본의 관세율 변화에 따른 우리나라 대일(對日) 수출변화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언론에서는 한국산 제품에 대한 수입 관세인상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관세율이 30% 가량 인상될 경우 대일 수출은 연간 최대 7.9%(2조8000억원) 감소하게 된다.
한국산 전자제품 핵심부품은 많은 수가 일제(日製)다. 미국이 한일갈등에서 일본을 택하고 일본이 손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한국에 제재를 가할 경우 ‘제조업’ ‘수출’ 의존도가 큰 우리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은 지난달 23일 “한국은 사안(강제징용 판결)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 한다”고 경고했다.
강제징용 판결 후속대책을 내놓는 등 일본에 강경태도를 고수 중인 문재인 정부도 내부적으로는 고심하는 분위기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작년 12월 “한일 양 국은 (과거사) 문제는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한일정상회담까지 거부한 현 상황에서도 관계개선을 위한 뾰족한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일본을 의식한 미국 영향인 듯 이번 G20정상회의 기간 중에는 한미정상회담도 열리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G20 이후 한국을 방문한다는 방침이다. 문 대통령은 대신 G20 기간에 중국,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한 정부당국 관계자는 “과거사는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이 총리 발언이 해답”이라며 “일본에 대한 지나친 감정적 대응은 결국 우리 손해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