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국가상징을 독점 지배하고 있는 무궁화. 어떻게 이 같은 지위를 누리게 됐을까? 윤봉길 의사 체포 시 사진이 일제의 조작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등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열정을 쏟아온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무대학원 교수가 이번에는 무궁화가 ‘근본 불분명하고 왜색 넘치는’ 상징이라는 근거를 제시한다.
일본 문헌과 문화에만 있는
중국과 일본과 달리 한국의 야생 무궁화 자생지는 전혀 없다. 무궁화가 자생 분포하는 곳은 산비탈, 개울가, 길 가다. 우리나라에는 인위적인 식재 지역인 인가 근처뿐만 아니라 산의 저지대, 개울가 및 길가 등에 저절로 자라는 무궁화 군락은 발견되지 않는다.
‘무궁화’는 1896년에 그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 이전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우리나라 옛 문헌에는 단 한 글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무궁화는 단 한 번 등장한다. 그마저 단명의 상징이다. 무궁화는 민간상류층이 향유하는 시조나 가사 등 풍류음악 내지 귀족음악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 더 올라가 아악, 당악,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궁중의 연례악인 궁중음악에서도 무궁화는 단 한 음절 단 한 소절도 없었다.
무궁화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은 종일 매국의 대표적인 인물인 윤치호가 작사한 애국가였다. 그에 비해 일본에서는 무궁화 노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 메이지와 다이쇼 두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단카 시인 사이토 모키치의 출세작도 ‘흰무궁화’다. 1938년 10월 히로시마에서는 ‘무궁화 단카회’가 발족돼 무궁화 단카 전문 월간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중 단연 압권은 ‘히노마루(日の丸)의 기’라는 동요다. 일본제국 국정교과서 소학교 1학년 음악교과서 맨 앞 부분의 ‘히로마루의 기’는 일본 국기 일장기를 예찬한 국정 동요다. 일본의 모든 동식물 중에서 품종명에 히노마루가 붙은 건 무궁화가 유일하다.
변장한 일본의 국기이자 군기
저자는 일본이 한국을 ‘무궁화지역’으로 조작한 목적을 무궁화의 신분세탁 과정을 통해 한국 병탄과 내선일체 작업의 매개체로 삼으려는 제국주의 책략으로 파악한다. 무궁화는 꽃나무로 변장한 일본의 국기이자 군기다. 일본인은 일장기와 욱일기를 흔드는 대신 무궁화를 심고 가꾸고 노래하고 받들고 사랑하며 심신에 새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타국으로 은밀한 확산을 꿈꾼다. 무궁화 꽃심의 붉은 원 일장(日章)과 일장 주위에 뿜어나오는 붉은 빛기둥 육광(旭光)을 감상하며 반도와 대륙에로의 팽창을 꿈꿨다.
1603년 도쿄에 막부를 설치해 에도 시대를 개막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섣부른 팽창에서 착실한 수렴의 시대로 대전환, 내공을 쌓기 시작했다. 이 책은 무궁화나무를 상층부의 정원에 심어놓고 히노마루와 소우탄 무궁화 꽃심의 붉은 원 일장(日章)과 일장 주위에 뿜어나오는 붉은 빛기둥 육광(旭光)을 감상하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면서 반도와 대륙에로의 팽창의 꿈을 내밀히 키워나갔다고 주장한다.
메이지 일왕은 무궁화를 형상화한 일장기와 욱일기를 국기와 군기로 제정했다. 메이지 일왕은 1870년 히노마루(日の丸)와 소우탄(宗旦) 무궁화를 각각 형상화한 일장기와 욱일기를 국기와 군기로 제정했다. 그리고 일왕 영토의 무궁한 확장 ‘천양무궁’과 그것을 꽃나무로 함축한 무궁화는 윤치호 등 종일 매국노에 의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무궁화는 일본회의 배지의 핵심문양으로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