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장애인의 날 우리 사회는 많은 정치적 노력으로 법과 제도에 있어 장애인의 삶을 지원하는 큰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의 의식 가운데 차별적 요소도 많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직장생활 속에서 장애인들의 삶은 알게 모르게 차별의 그늘에서 육체적, 정신적 고단함을 보이고 있다. (본문 중)
2018년 5월 29일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교육’이 법정 의무화되면서 시급한 강사 수요를 대처하기 위하여 공단 직원 대상으로 강사교육이 시작되었다. 제공된 교육자료는 생동감을 주기에 부족하였고 실감할 만한 컨텐츠가 필요했다. 교육내용 중 ‘장애인’과 ‘장애유형’의 이해에 대한 내용도 법과 교과적 내용이다 보니 매우 딱딱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금방 사라졌다. 어린시절 이웃에 살던 형들과 동생들이 생각났다. 강원도 철원의 50여호가 모여 살던 우리 마을에는 나 보다 열살 이상 나이 많은 청각장애인 형이 있었다.
상훈이형(가명)은 듣지도 말할 수도 없었기에 알 수 없는 소리를 냈지만 그 얼굴과 손짓, 몸짓으로 마을 어른들과 적절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훈이형은 손재주가 좋아 동네 경운기, 양수기 등 못 고치는 기계가 없었기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꼭 그 형을 찾아 문제를 해결받곤 했다.
상훈이형 집에 갈 때마다 큰 함지 대야에는 가물치, 잉어, 메기 등 물고기들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직접 나룻배를 만들어 뒷강에서 그물을 치며 잡은 고기였다. 상훈이형과 소통은 힘들었지만 참 순박하고 능력있는 형이었다.
우리마을에는 다섯 살 위의 발달(지적)장애인 형이 있었다. 발달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없던 그 시절 아이들은 그저 바보형이라고 생각했다. 어린나이임에도 나는 찬현이형(가명)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겠다고 제법 호기롭게 나섰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못 가 가르쳐 준 내용을 확인하면 찬현이형은 언제 배웠냐는 듯 모두 잊고 있었다. 비록 글을 배우는 능력은 없었지만 늘 웃으며 나를 볼 때는 멀리서도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인사해 주던 형이었다.
이 외에도 약물복용 부작용으로 태어날 때 손가락, 발가락이 붙고 키가 자라지 못한 태영이(가명), 태영이는 몸은 장애로 불편했지만 어려서부터 글을 빨리 깨우쳐 똘똘이라 불리웠다. 또 다른 청각장애인 여자 동생인 미순이(가명), 어린 나이임에도 많은 동생들을 업으며 잘 돌보던 아이였다. 손작두로 소 꼴을 썰다가 왼손 네 손가락을 잃으신 동네 아저씨, 사고 이후에 늘 벙어리장갑을 끼고 다니셨지만 여전히 많은 일을 능숙하게 하셨다. 그리고 전방(민통선 안)에 있는 논 밭에서 일하다 6.25 전쟁 때 묻혀진 발목지뢰로 손과 발을 잃으신 많은 고향 분들과 어울려 살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그들은 가족이고 친구였으며 이웃이었다. 함께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고 희로애락을 나누는 우리들이었다.
어린시절 함께 살고 있던 나의 이웃사촌, 장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강의에 담아 전달할 때 듣는 이들의 눈동자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교육’ 중 ‘장애인과 장애유형에 대한 이해’를 강의할 때마다 보다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2021년 장애인의 날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많은 정치적 노력으로 법과 제도에 있어 장애인의 삶을 지원하는 큰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의 의식 가운데 차별적 요소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직장생활 속에서 장애인들의 삶은 알게 모르게 차별의 그늘에서 육체적, 정신적 고단함을 보이고 있다.
어린시절 농촌마을에서 공동체적 삶을 살아갔던 것처럼 직장 공동체에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없이 가족이요, 친구요, 이웃으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은 아직 요원한 것일까?
**. 조영기 센터장은 1997년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입사 현재 '고용공단 경기북부 발달장애인훈련센터장'으로 근무 중입니다. 2018년 '장애인인식개선교육 강사 취득' 후 다양한 기업을 찾아 '직장 내 장애인인식 개선교육 강의'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 본 칼럼은 본지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