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길 물속을
손가락 한번 튕김으로
알 수 있으랴
보이는 것을 넘고
무의식을 관통하여
그림자 없는 나를 찾아
붓끝이 닳아 없어짐이 얼마이던고
푸른빛 쫓아
긴 시간 꿈을 깨워
수행의 흐름을 담아내고자
먼 길 떠나네
<법관>
40년간 수행해온 선승 법관(65)이 3월 30일부터 5월1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개인전 <선禪2022>을 개최한다.
200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선화(禪畵) 작업을 이어온 법관의 다채로운 신작을 볼 수 있어 새로웠다. 근작 회화 42점과 족자와 직접 구워낸 소박한 도완까지 모두 44점을 내놓았다.
기존의 필법이나 그림의 기초를 학교에서 배운 경험이 전혀 없는 그에게 그림은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 그림은 수행의 한 부분입니다. 세필로 내면의 기운을 작품에 쏟아내며 그리는 선화(禪畵)는 그 자체로 수행입니다.”
그에게 독경을 하는 일이나 텃밭을 갈고 차를 마시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나 모두 ‘더 높은 정신세계’로 나아가려는 수행의 하나라 한다.
“모양은 다르나 그 본질은 모두 ‘나를 찾는 일’이죠. ‘있는 그대로의 나’ ‘섞이지 않는 나’를 과정이구요.”
그의 그림은 약 30년전 구상도 추상도 아닌 수묵화로 시작되었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내 집은 비록 가난해도 늘 한가롭다네’ 라는 글귀와 함께 먹선 몇 번으로 고졸하게 집 풍경을 그린 족자(2009)는 근작 단색화와 차별화되는 초기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멋부리지 않은 다완(2011)은 그래서 더 정감이 넘친다.
그런 그에게 추상화 화풍이 더 진해진 것은 2019년 즈음. 단색조 형태로 자연스럽게 변했다. 그리고 씨줄, 날줄이 교차해 만든 직선은 점차 파상의 반복적인 곡선이 되어갔다.
“그저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어요. 하루 서너시간을 잤나. 서서히 그림도 변해가더군요. 다완은 2011년에 처음 여인상과 같이 만들었어요. 저는 전업작가이자 선화 그리는 스님으로 살아왔어요.”
한점의 다완과 족자 그림만으로도 갤러리 전체에 은은한 차향이 퍼지는 듯하다.
“초기와 비교하면 물감과 재료가 달라졌을 뿐 저의 내면은 같아요. 그저 수행의 한 방법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지요. 마치 평생봐도 지겹지 않은 벽지 같은 추상화가 지금 제가 그리는 그림입니다.”
많은 시간 연구하고 노력했다는 그는, 선과 선이 부딪치지 않는 것에 대한 연구만 1년 3개월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남의 것을 보고 베끼는 것은 수행이 아니기에 해볼 생각이 애초 없었다.
“작가는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그는, “작품이 잘 안되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 거짓과 인위적인 작용이 있어 막힘이 온다”고 말한다. “마음이 자유로워야 표현도 자유로워진다. 모든 사물과 사람과의 관계, 말 속
에도 균형감각이 중요하다”라고도 말한다.
법관에게 그림은 ‘나를 찾는 수행’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복적 행위의 작업은 선(禪)의 세계를 추구하는 수행의 한 방법이자, 삶 자체이다.
그가 선보이는 ‘선화’란 부처의 정신과 화두가 담겨 있는 선종미술의 한 형태이다. 승려들의 수행 과정에서 ‘마음’의 영역을 화필 위에 표현한 것으로, 고유의 독자성을 품고 있다. 초월적 존재 아래의 겸허한 인간이자 예술가, 승려로서 수련의 과정을 기록하려는 의지인 셈이다.
“형(形)의 재현에서 벗어나 정신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궁극적 목표죠.”
그의 선화는 ‘선’의 세계와 수행에서 얻은 정신을 현대적 조형 감각으로 풀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법관이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화가이나 이제 그는 한국 단색화의 중요한 대표적 작가 중 한사람이 되었다”면서 “분명히 그의 작품은 지고한 정신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의 결정체”라고 평한다.
처음에는 산, 물, 풀, 바위와 같은 사물들을 단순화하여 마치 탱화를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장엄한 색채로 형상화했지만 자연스럽게 단색화가 되었다.
“동양화, 서양화로 나누는 것은 제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에요. 그림의 변화를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아요. 그리고 싶은대로 그리다보면, 앞발자국과 뒤발자국이 서로 연결되어 쭉 흘러가죠. 몇 년 뒤 보면 자연스럽게 달라져있는 거죠. 갑자기 그림이 확 달라진다면 어색하고 근거없는 거겠죠.”
그의 작품 ‘선’ 시리즈 중에 마치 가는 실로 한땀한땀 바느질한 듯한 그림들이 있다. 영락없이 스티치 작업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세밀한 작업의 성과다.
“3년전만해도 하루 15~18시간씩 그림을 그렸어요. 시간이 워낙 많이 걸려서 그렇게 작업하지 않으면 그림이 안나와요. 그 바람에 허리 디스크로 화장실도 기어다녔답니다.”
결국 지난해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는 그는, 아직 허리가 아프지만 손을 놓으면 손이 굳기에 그 감각을 가져가기 위해 매일 작업을 한다고 밝혔다.
하루 15~18시간 수행하듯 그리다 디스크 수술도
작품을 위해 밑칠인 젯소칠하기를 3~5회 한 후 그 위에 아크릴 물감을 최소 8회, 최대 최대 12번까지 칠한다. 반복해 드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붓질이 중복되며 선과 점, 면이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작품에 따라 중간중간 빨강이나 다른 색의 점들이 나타난다.
이 점들을 찍는 이유에 대해 법관은 “그림은 수행의 일환이다. 너무 완벽하지 않기 위해, 여유로움을 얻기 위해서”라 답한다. 마치 밤 하늘의 별 같기도 한 이런 점들은 기존의 단색화와 또다른 차별점이 되기도 한다.
그는 사물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단다. 대상 고유의 아름다움을 끌어내고자 하는 오랜 버릇인 셈이다. 사물의 균형을 해치지 않으며,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불가의 가르침의 일환이다.
이러한 점은 작업세계에서도 드러난다. 화면은 수많은 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관은 민화에서 드러나는 서정적인 선을 ‘한국적인 획’이라 칭한다. 투박하지만 강한 부드러움을 보여준다고 했다. 팽창하고자 하는 직선과 품어내고자 하는 곡선의 만남이 ‘확장과 융화(融和)의 충돌’로 새로운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작품은 벽면을 메우는 크기의 대형 회화부터 한눈에 담기는 소품까지 화면의 규모가 다채롭다.
학고재 본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선’(2021-2022) 3점을 마주하게 된다. 작품은 청색이나 적색, 황색, 흑색 등 한국 전통의 단색들이 주를 이룬다.
법관의 색은 선과 면, 번짐과 여백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색채가 갖는 특성보다 작품의 정신성을 더욱 드러낸다. ‘선2021’(2021)은 먹색과 푸른 빛깔을 아우르는 묘한 색감과 중앙에 보이는 사각의 형상은 법관의 최근 신작으로 ‘선’ 연작의 정점을 보여준다.
작품 속 은근히 드러나는 질감과 선의 질서들은 한국 전통 삼베를 연상시킨다. 소형 회화에서는 그들만의 리듬과 운율이 느껴진다. 투박하지만 담백하고, 부드럽지만 단단해 보이는 선들의 이야기, 그 은은한 아름다움이 말을 걸어온다.
법관은 누구?
법관은 2002년 강릉의 선아트 화랑에서 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인사아트스페이스(서울), 한가람미술관(서울), 한국미술관(용인), 올미아트스페이스(서울), 갤러리마크(서울), 갤러리C(대전) 등 국내 유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물파스페이스(서울), 리안갤러리(서울, 대구)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강릉 능가사(楞伽寺)에 머물며 수행과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