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을 호령하듯 웅장하고 빼어난 자태를 뽐냈던 숭례문 주변에 아직도 남아 있는 매캐한 냄새에 다시 한번 절망한다. 못난 우리들의 부주의로 후손들은 숭례문의 진정한 위용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600여년의 긴 세월을 굳건히 견디어온 서울의 정문(正門)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지진이 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폭탄이 난무하는 전쟁 상황도 아닌 21세기 첨단문명 시대에 고작 '1.5ℓ시너 한통' 에 라이터 불을 막지 못해 대한민국의 상징을 태워먹다니 허망하다 못해 인생이 이런 것인가 싶어 말문이 막힐 뿐이다.
국보 제1호의 소실. 숭례문 화재 참사로 2008년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더욱이 국민이 공분을 하고 있는 것은 이번 참사가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에 의한 불가피한 것이 아닌 관계기관의 관리소홀과 무관심, 방치로 인한 인재였다는 점이다.
화재진화에 실패한 소방당국과 지속 관리를 못한 중구청, 서울시장 시절 숭례문을 개방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여론도 있지만 무엇보다 제 1차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문화재청으로 국민의 비난 여론은 그동안 국보급 주요 문화재 관리 책임조차 지자체에 떠넘기며 '나 몰라라' 했던 국가 기관의 무책임함에 집중돼 있다.
더욱이 숭례문 화재가 나던 시점에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부인과 함께 외유성 의혹이 있는 해외출장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공직자로서의 처신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 데다 한나라당에서는 유 청장의 외유 논란과 관련, 뇌물죄 성립 여부 등에 대한 진상조사를 주장하고 나서 주목된다.
이처럼 국민 공분이 일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관심밖으로 밀려 있었던 국가 국보급 문화재 관리 매뉴얼과 사후 수습 대책, 유 청장의 거취 여부, 관련자의 처벌 등 또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어 다각적인 진단이 필요하다.
◆맹탕 매뉴얼로 600년 문화재 지키려 했다니
'당황하지 말고 119에 신고', '상황을 정확히 판단 후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 지난 2006년 2월 문화재청이 만들어 지방자치단체에 배포한 '문화재 화재 위기대응 현장조치 매뉴얼'에 나와 있는 화재 발생 때의 행동 요령이다.
52쪽 분량의 이 매뉴얼은 2005년 강원 양양군 낙산사 화재 이후 문화재 방재대책으로 마련된 '문화재 재난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의 일부로 '중요 건조물문화재 화재 예방', '화재 발생시 행동요령 및 문화재소산', '화재 피해 복구' 등의 지침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매뉴얼에 적혀 있는 초기 소화 활동 내용은 '안전핀 링을 잡아 빼고, 노즐을 잡아 화점을 향한다'는 식으로 소화기와 옥외 사용전의 사용 방법을 일러줄 뿐이었다. 매뉴얼은 '건조물문화재는 화재에 매우 취약한 목조 건축물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정작 목조 건축물에 큰불이 났을 때는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다.
단지 건축물 안에 있는 중요문화재를 위한 대피시설을 확보하고, 어떤 순서로 옮길지에 관한 '소산대책'만 담겨 있다. 11일 숭례문 화재 현장을 방문한 문화재청 이성원 차장도 이 매뉴얼이 화재 초기 대응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매뉴얼이 이처럼 무용지물이 된 것은 소방전문가가 아닌 문화재청 공무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이 매뉴얼을 관리하는 문화재안전국 직원 9명 중 소방전문가는 한 명도 없는 것이 문제.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매뉴얼 부록에 실린 비상연락망은 단 한차례도 바뀌지 않았고 연락망 중 행정자치부 장관이 맡도록 돼 있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에는 2006년 3월 퇴임한 오영교 전 장관의 이름이 여전히 적혀 있다.
한편 이 매뉴얼은 현지 실정에 대한 파악도 부족해 전국 234개 지자체는 매뉴얼을 아예 보지도 않고 있으며 단적인 예로 매뉴얼은 문화재 화재 예방을 위해 문화재소유자 및 관리단체 등이 자체 소방대를 조직해 소방훈련을 하도록 하고 있지만 이를 지키는 자치단체는 전무한 실태다.
이뿐만 아니라 화재 당시 소방당국은 관계 기관에 숭례문의 건축도면 등을 요구했지만 정작 급할때는 받아보지 못했으며 유 청장은 신중한 진화를 요구했다는 책임공방이 일자 12일 "우리는 화재 당일 오후 9시 30분에 소방방재청에 '(숭례문이)파괴돼도 좋으니까 진화하라'고 위임했다"고 주장했다.
이제껏 알려진 바로는 유 청장이 화재 진화당시 소방당국에 숭례문은 국보이니 신중을 기해달라고 주문해 진화팀이 초동 진화에 어려움을 겪어 결국 전소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지만 이날 청와대에서 국무회의에 참석한 전 유 청장이 펼친 주장대로라면 책임소재에서 벗어난 것.
그는 이같이 말하면서도 "문화재청 건축문화재 과장이 그렇게 말했다고 보고 받았다"며 "그래도 문화재에 대한 관리책임은 지자체에 위임돼 있지만 지도, 감독, 지원은 문화재청이 해야 한다"고 숭례문 화재에 대한 문화재청의 책임을 인정했다.
유 청장은 그러나 숭례문 화재를 초동진화 못한데 대해서는 "불이 났을 때 진화하는 것은 소방당국이 하는 일"이라며 거듭 소방방재청 책임론을 폈다.《자세한 내용은 시사뉴스 창간20주년 324호 커버스토리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