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등과 함께 북만주 무장항쟁 주도
[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북만주 독립군 최고지도자였던 오석 김혁 장군의 82주기 추모식이 23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과 독립유공자 묘역에서 추모객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오석 김혁 장군 선양회가 추모식을 주관하고 국가보훈처와 광복회가 후원했다.
오석 김혁 장군 선양회는 "오직 조국의 독립항쟁을 위해 일생을 바친 오석 김혁 장군의 고귀한 독립정신을 기억하겠다"며 "김혁 장군을 비롯한 존경하는 독립투사 선조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고 올해 자랑스러운 임시정부 102주년을 맞이했다"고 설명했다.
김혁 장군은 1875년 10월6일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고 정위로 근무하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되면서 독립항쟁에 투신했다.
그는 1919년 용인에서 3·1만세혁명을 주도하다가 만주로 이동해 무장 독립항쟁을 주도했다. 1920년 흥업단(興業團) 부단장으로 활동했으며 대한의용군 부단장, 북로군정서 군사국장을 맡았다.
1921년에는 대한독립군 군사부장을 역임했고 1923년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으로 선출됐다.
1925년 북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무장단체인 대한독립군정서를 이끌었던 김혁 장군과 대한독립군단의 김좌진 장군은 중동선교육회를 비롯한 16개 지역 대표와 국내 대표들과 함께 신민부(북만주지역에서 결성된 항일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신민부에서 체계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성동사관학교가 설립됐다. 이 학교 교장에 김혁, 부교장에 김좌진이 임명됐다. 김 장군은 1926년 고려혁명자후원회를 조직해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김 장군은 1929년 6월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7년형을 구형받고 6월13일 최종 판결에서 10년형을 언도 받았다. 평양감옥에 수감됐던 그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돼 옥고를 치르다 병환이 위독해 1935년 5월26일 가출옥했다. 김 장군은 용인 본가에서 1939년 4월23일 65세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는 원래 고향인 용인 농서리에 있었으나 1974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됐다.
1985년 용인시 기흥구 구갈리에 오석 김혁 장군 독립운동기념비가 건립됐다. 2008년 3월 강남대 옆 구갈동으로 독립운동기념비가 이전됐고 김혁 공원이 생겼다. 2016년부터 김혁장군의 항일 무장항쟁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오석문화제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