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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는 누구인가?

김부삼 기자  2009.05.26 1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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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봉화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몸을 던진 봉화산 부엉바위. 봉화산은 알고 있었을까?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3일 이른 아침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준 곳으로 되돌아갔다. 세상의 등불을 꿈꾼 소년 노무현과 함께 했던 봉화산은 어느새 훌쩍 자란 ‘대통령 노무현’을 영원히 품게 됐다.
63세를 일기로 타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숨길과 희비가 담긴 한편의 ‘서사시’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그만의 ‘원칙’과 지역주의에 항거했다가 번번이 좌절한 ‘소신’을 무기로 최고 권좌에 올랐지만 퇴임 후 짧았던 삶은 불행했던 전직 대통령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초라했다.
정치개혁의 선봉에 섰고 깨끗한 정치, 반칙없는 사회를 실현하겠다고 장담했다. 인권변호사로 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대통령에 당선돼 재임할 때까지 그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에서 주류를 비웃는 한국 정치사의 이단아였다.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민주당의 영남 출신 대선후보라는 성립될 것 같지 않은 그림도 그렇지만 재임 당시 국회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고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헌정사상 첫 대통령이라는 점을 돌이켜볼때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노무현도 대통령이 됐는데”라는 말은 농담처럼 흘려졌지만 서민들에게는 희망의 씨앗이 됐고 서민출신 대통령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끼게 했다. 바보 노무현으로 불렸고, 노짱으로 통했다.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유행어를 남겼고 “노무현이 하니까 반대하는 것 아니냐”는 어록도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인생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있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9월 1일 경남 진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노판석씨(1976년 작고)와 이순례씨(1998년 작고)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이 태어난 봉하마을은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것이 없다”고 하던 가난한 곳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어려웠던 집안 사정 때문에 ‘가사조력(家事助力)’으로 인한 결석이 잦았다. 중학교 1년 휴학, 야간 경비로 일하며 공부하던 부산상고 재학 등이 가난했던 그의 어린 시절을 대변한다.
초등학교는 그런대로 마쳤지만 학비가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뻔했다. “책값만 먼저 내고 복숭아 농사를 지어 입학금을 나중에 내면 안 되겠느냐”고 통사정한 끝에 학교를 다녔지만 졸업하는데 4년이 걸렸다. 의협심이 강해 3·15 부정선거 직전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작문 과제를 내주자 백지 제출을 주도하기도 했다.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노 전 대통령의 꿈은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하면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7개월 만에 판사직을 그만둔 노 전 대통령은 ‘변호사 노무현’으로 가난 탈출이라는 목표를 이뤘다.
1981년 그의 인생을 또한번 바꿔 놓는 부림사건을 맡기 전까지 그는 돈 잘 버는 변호사였다. 부산 향토기업들의 상속세 반환 소송 등을 도맡다시피 했고 100억 원 이상의 거액 소송을 맡기도 했다.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지냈으며 요트 타기도 즐겼다.
‘부림사건’은 노 전 대통령의 인생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부산의 운동권 학생 30여명이 일명 ‘좌경학습’을 하다 검거된 이 사건의 변론을 맡게 된 그는 시국(時局)의 급박함을 온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은 “부림사건 변론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이후 학생 운동권과 접촉하며 재야인사와 교류를 시작한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제3자 개입 혐의 등으로 구속돼 변호사 업무가 정지됐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도 이때다.
돈키호테 같은 용기를 눈여겨본 김영삼 (金泳三)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측의 권유로 88년 13대 총선에 출마, 5공 실세였던 허삼수 후보를 꺾고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신데렐라처럼 부상, 한국정치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게 한 무대는 88년 5공 청문회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를 시청하던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청문회 스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90년 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의 손을 뿌리치고 합류를 거부한 뒤 지역주의의 벽에 막혀 낙선을 거듭하는 등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98년 보궐선거 때 서울 종로에서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총선에서는 부산에서 당시 허태열 한나라당 후보에 패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재임기간 내내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노력했고 지방분권, 지역균형발전 정책 등도 당시 구의 구상에서부터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지역주의에 염증을 느끼던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선에 도전했으며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중심으로 하는 단단한 지지세력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노풍(盧風)’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노풍의 진원은 호남이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고 이는 ‘이인제 대세론’을 함몰시키면서 전라도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경상도 출신 후보로 나서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그는 대선날 새벽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철회했지만 마지막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정면돌파를 택했고, 정치 인생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그 특유의 승부수는 청와대 입성의 ‘기적’을 이뤄냈다.
그의 재임기간은 영욕의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2004년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여소야대 구도에서 열린우리당 지지발언 등 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해 가결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3월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14일까지 63일 동안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모든 분야에서 언제나 ‘새로운 정치’를 추구했던 그의 끊임없는 시도는 때로는 극찬을 받기도 했고 또 때로는 민심이반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퇴임 전까지 노 전 대통령은 정치, 경제, 대북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상대의 허(虛)를 찌르는 승부수를 던지는 ‘정치 실험’을 그칠 줄 몰랐다. 2005년 8월에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고, 2007년 4월 레임덕에 시달리자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했다. “왜 개헌하면 안된다는 것이죠”라는 질문은 유행어가 됐다.
“내가 걸림돌이 된다면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겠다”며 나왔고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는 보따리 장수 공방도 벌였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인터넷 서핑을 즐겼고 때문에 댓글대통령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국정브리핑에 댓글을 달며 공무원들에게 자주 찾을 것을 권해 야당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녔다.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이룬 업적에 대해서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선거자금을 둘러싼 정경유착의 고리를 없애려던 노력은 평가받을 만하다.
삼권분립을 가장 중시했고 국가정보원과 사법부 독립에 앞장섰다.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했고 권력기관 기관장들의 임기는 철석같이 지켜줬다.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이 됐고 지난 23일 서거 전까지 그의 삶은 정치실험 자체였다. 《자세한 내용은 주간 시사뉴스 창간 21주년 353호 커버스토리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