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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정권교체 노벨평화상

김부삼 기자  2009.08.18 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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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생역정은 호남민들과 호흡해온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탯줄이면서 정치적 고비때마다 함께 해온게 광주, 전남지역이고 호남민이다. 호남을 빼고 DJ를 말할수 없고, DJ를 뺀 호남지역정치도 성립될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25년 12월3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씨와 어미니 장수금씨 사이에서 네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을 후광(後光)은 훗날 아호가 되기도 했다.
초당서당과 하의보통학교를 거쳐 지난 1936년 목포제일보통학교(현 목포북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하면서 그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1943년 목포상고를 조기졸업한 뒤 목포상선회사에 취업했으며 45년 해방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가했다. 목포일보사 사장과 목포해운회사 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에는 인민군에 체포돼 목포형무소 투옥중 처형 직전 탈출해 첫번째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1954년 목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56년 5월 장면 박사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해 58년 강원도 인제에서 제4대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의 방해를 입후보 등록이 무효화돼 이듬해인 59년 등록방해소송을 승소했지만 6월 인제 보궐선거에서 또다시 낙선했다.
19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해 3전4기 끝에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됐으나 5.16군사쿠데타로 국회의원 선서도 하지 못한채 의원직이 박탈됐다.
1963년 목포에서 제6대 총선에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64년 국회 본회의에서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상정지연을 위해 5시간 45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을 해 국회내 최대 연설시간으로 기네스인증서를 받기도 했다.
1971년 신민당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으며 제8대 총선 후보 지원유세중 트럭 압살기도 사건이 발생했다. 평생 발을 절었던 것도 바로 이 사건의 후유증이다.
1973년에는 도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돼 2차례 살해위기를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반유신투쟁을 벌이다 가택연금에 시달렸으며 1980년 사면복권됐지만 신군부에 의해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내란음모죄 등으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미국, 독일 등지의 구명운동으로 5번째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맡아 민주화요구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나 54번째 가택연금 조치를 당했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연금해제.사면복권조치된뒤 17년만에 광주를 방문해 망월동 5.18묘역을 참배했으며 28년만에 고향인 목포와 하의도를 방문했다.
88년에는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했고 이듬해 야3당 총재들과 함께 5공 청산 및 민주화조치 등 7개항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후 13대, 14대 대통령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신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1995년 7월 정계은퇴 2년7개월만에 정계복귀를 선언한뒤 97년 12월 ‘수평적 정권교체’, ‘준비된 대통령’으로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또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 고비고비마다 함께 해온 이들이 바로 호남민이다. 그가 즐겨 사용했던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문구도 바로 그 연유에서 비롯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