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아직까지 정운찬 총리-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체제의 위력이 어디까지 일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정-정 체제의 출범은 경쟁상대 없이 차기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달리던 박 전 대표에게 있어 장애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박 전 대표의 정치력이 다시 시험대에 섰다는 말이 나온다. 박 전 대표를 비롯한 친박 세력 내부에는 전혀 기류변화가 없지만 그를 둘러싼 외부환경이 급변한 것만은 사실이다.
◆정몽준의 압박
당내에서 최대 경쟁상대였던 정몽준 대표는 입당 1년 10개월만에 당 대표직을 거머쥐고는 기존의 ‘재벌 이미지’를 탈색하는데 주력,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당장 정 대표의 행보만 봐도 그렇다.
재벌이미지로 낙인찍혀 있던 정 대표는 정치스타일의 변화를 과감히 꾀했다. 그동안 정 대표에게 나타났던 이미지는 ‘치밀형’. 치밀형의 대표적인 특징은 ‘소심하고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8일 대표 취임과 함께 정 대표는 ‘소심’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어졌다. 우선 유례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며 각계 지도층과 접촉을 넓히고 있는 모습이다. 정 대표는 지난 10일 오전 최고위원회의 직후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스님을 예방하고 이어 천주교 서울대교구청 주교관에서 정진석 추기경과 만났다. 또 오후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잇따라 찾아 교계의 목소리를 두루 들었다.
정 대표는 취임 첫 행보로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았고, 현충원 참배와 취임 기자회견을 마친 이후에는 사무처 당직자들과 미팅을 했다.
또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와 만나 국회 정상화 및 여야관계 복원에 나섰으며 지난 9일에는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 등 군소야당 대표들과도 잇따라 만났다.
정 대표는 취임 첫 날부터 “개방적인 정당이 돼야 한다”며 당 개혁 입장을 밝히는 등 심상찮은 행보를 시작했다. 이는 외부세력 영입 등을 통해 기존의 친李-친朴 구도를 깨면서 동시에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보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명박 대통령 또한 정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다. 취임 1일 만에 이 대통령과 첫 당청회동을 가진 것도 이례적이다.
지난 9일 만남에서 이 대통령은 정 대표 등 당 지도부에게 “당이 활기차 보여서 좋다. 당이 젊어 보인다”며 정 대표를 추켜올렸고, 정 대표는 “당과 국가를 위해 사심없이 대표직을 수행하겠다”고 답했다. 뿐만 아니다. 이 대통령은 정 대표에게 정치적 ‘선물’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 대표가 꺼낸 ‘동서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답한 것이나 “대통령과 정례적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표뿐 아니고 중진 의원, 다른 의원들도 이런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이날 당청 회동을 마친 뒤, 이 대통령이 20분간 정 대표를 따로 만난 것도 정 대표에게 무게를 실어주려는 배려로 볼 수 있다.
당 주류 쪽도 일단 정 대표의 연착륙을 돕는다는 입장이다. 친이 직계인 조해진 의원과 이재오계인 정양석 의원이 각각 대변인과 비서실장에 기용된 것도 친이 쪽과 정몽준 대표의 협조체제를 의미한다.
비록 과도기 체제이긴 하지만 엄연한 여권 내 ‘잠룡주자군’에 포함된 정 대표로선 집권 여당의 대주주인 이 대통령의 정치적 추인이야말로 상대적으로 약한 당내 정치적 입지를 키울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다. 당내 최대 지분을 소유한 친이계를 향해 정 대표와의 ‘협력적 관계 정립’을 우회적으로 주문하는 동기부여도 된다.
또한 정운찬 총리-정몽준 대표 체제가 갖는 ‘정치적 신선감’이 박근혜 전 대표의 독주체제로 굳어져 온 여권 내 권력지도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차기 대권주자군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는 동인(動因)도 되고 있다.
이 대통령으로선 내년 초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중동의 움직임을 보이는 여권 내 권력투쟁의 강도를 최대한 줄이면서 친서민정책, 감세, 4대강 살리기 등 핵심 국정과제를 강력 추진하기 위해선 정 대표의 중립적 입지가 오히려 힘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10월 재보선을 정 대표가 승리로 이끌 경우 정 대표는 차기 대권주자 가운데 가장 큰 입지를 구축하며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박근혜 전 대표를 뛰어넘어야 가능한 일이다.
반면 박 전 대표 측은 상대적으로 느긋하다. 아직까지 정몽준 체제의 출범이 위협적이지는 아닌 모양이다. 지난 7월 미디어법 반대 발언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진 못했지만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도 압도적인 대권 후보 1위로 꼽히는 등 지지 기반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운찬 카드의 승패여부는?
박 전 대표의 입장에서는 짜증날 일이지만 대권주자 가운데 한명이었던 정운찬 후보자의 정계 등장은 정치권에서 볼때 모처럼 흥미진진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흥행 대박’ 아이템을 선보인 셈이다. 이 대통령은 진보학자로 분류되는 정 총리 내정자를 영입함으로써 일석사조, 일석오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우선 진보와 통합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충청권 총리로 탕평인사의 모양새를 갖추었고, 냉담하기 짝이 없는 충청 민심을 아우르고, 신경 거슬리는 박 전 한나라당 대표의 대권가도 독주도 견제할 수 있는 카드이기 때문이다.
‘정운찬 흥행’은 상당기간 이어질 것이다. 평소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중시해온 자칭 타칭 케인지안인 정 후보자가 극단적 신자유주의자인 이 대통령과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우려와 호기심이 일고 있다. 진보적 사고를 지닌 것으로 알려진 그가 용산참사와 미디어법, 부자감세, 공안통치 등 사회적 갈등을 빚어온 현 정부의 보수적 행보와 어떻게 보조를 맞출 것인지도 주요 관심 사안들이다.
무엇보다 정 총리 후보자는 검증된 것이 거의 없다. 서울대 총장을 지냈지만 정치권과는 무관한 일이다. 이 때문에 정 후보자는 총리 역할을 통해 능력을 입증해야만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게 된다.
정 후보자는 △세종시 추진 △4대강 예산편성 △정치개혁 △경제위기 극복 등의 과제를 안고 출발한다. 벌써부터 세종시 수정발언 때문에 정치권 논란이 뜨겁다.
4대강 사업을 놓고서도 학자로서의 소신과 총리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관심이다. 유력한 경제학자로 꼽히는 그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어떤 처방을 내놓을지도 주목된다.《자세한 내용은 주간 시사뉴스 창간 21주년 360호 커버스토리에서 이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