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예(禮)’라 하면 무겁고 딱딱한 느낌이 들기 쉽지만 쉽게 표현하자면 ‘예’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상대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결코 무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사랑도 예의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의가 없는 곳에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다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대해서도 예를 지키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이지요.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인사법이나 대화법 등 나라나 시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예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지요.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소중히 여기는 값비싼 보석이 있다면 조심조심 다루겠지요. 하물며 진정 상대를 사랑한다면 얼마나 소중히 대하겠습니까?
상대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면 무례함이 나옵니다. 사소하지만 전화를 할 때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습니다. 밤늦게 전화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오랫동안 붙들고 있다면 상대에게 피해를 줍니다. 또 약속시간에 늦는 것,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간혹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인데 그처럼 일일이 따지는 것은 너무 정감 없지 않나?’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내 편에서는 모든 것을 이해할 만큼 허물없는 사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음을 알아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정작 그 언행을 보면 사랑과는 거리가 멀고 무례히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배 시간에 조는 모습입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존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진실인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옆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거나 딴 생각을 하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부족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일이지요. 이는 설교자에게도 무례한 것입니다. 혹 설교자가 ‘말씀이 은혜가 되지 않나?’ 염려해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이 됩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람이 되려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법’을 기준 삼아 행해야 합니다.
사랑의 법이란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법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해 나가는 만큼 그리스도의 교양을 갖춰 범사에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사랑의 법에 담긴 또 한 가지의 의미는 바로 ‘배려’입니다. 배려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준행하여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례히 행치 않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 13장 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