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이상미 기자] 1984년 11월, 세계 3대 오페라단으로 통하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로 현지의 관심이 쏠렸다. 미국의 세계적인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71)이 지휘하는 모차르트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 이 꿈의 무대에 아시아인 가수가 올랐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자 '세르빌리아' 역을 맡은 소프라노 홍혜경(55)은 서정성 짙은 목소리와 고혹적인 자태로 단숨에 주목 받았다. 뉴욕타임스 등 미디어의 호평이 잇따랐다. 동양인 가수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주역으로 나선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이후 '라보엠'의 '미미', '리콜레토 '의 '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피가로의 결혼'의 '수산나' 등 여가수라면 탐낼만한 캐릭터를 도맡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렇게 메트 오페라 무대의 '프리마 돈나' 또는 '안방마님'으로 활약했다.
올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 30주년을 맞은 홍혜경은 2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30년 전 기억이 아직도 살아 있어요. 가장 뜻 싶은 날이었죠”라며 웃었다.
15세에 미국으로 간 홍혜경은 1982년 한국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뉴욕 메트로 오페라는 링컨센터 안에 함께 있는 줄리아드 음악원 예비학교에 다닐 때부터 꿈의 무대였다.
하지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첫 러브콜은 거절했다. “본인에게 맞는 배역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고사했다. 당시 메트로폴리탄이 제안한 작품은 현대 오페라 '룰루'였다. 다중인격, 섹스 등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린 작품으로 홍혜경에게 창녀 역을 제안했다.
“오페라의 가수에게는 상당한 유혹이 따르죠. 음악의 세계는 참 좁아요. 여기서 노래를 잘 하면 전체가 알게 되고, 초청이 들어오죠. 그런데 자신을 아는 게 중요해요. 유혹을 따라가서 목이 망가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는 그때 오래 가는 것이 목표였어요. 정말 노래 잘하는 분들이 3, 5년 지나서 사라지는 걸 보고 일찍 깨달았죠. 목소리를 잃지 않고 다 성장시켜서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거였죠.”
젊었을 때는 힘이 있어 목소리를 내지르면, 자신의 한계치를 벗어난 소리도 나온다. “그런데 그게 제일 나빠요. 목소리가 성장하기 전 무리하는 거죠. 사람의 목소리는 35세에 완전히 성장합니다. 그 전까지 내 목소리가 뭔지 알아야하고 올바른 테크닉을 익혀야 하죠.”
홍혜경은 “자신의 목소리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제 목표는 55세까지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이었어요. 지금은 그 나이가 넘었으니 이제 커리어를 어떻게 접어야 하는지가 과제이고 또 꿈을 꾸고 있죠”라고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에 가장 맞는 오페라는 모차르트다. “희한해요. 성대에 비타민이 됩니다. 모차르트를 부르면 성대가 건강해져요. 모든 것을 자기 목청으로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유연하게 건강하게 만들어야합니다.”
오페라단이 하나의 단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도 메트로폴리탄에서 장수한 비결이다. “저는 '디바'라는 수식이 싫어요. 한국에서는 좋은 의미인데 미국에서는 '디바'하면 이기적이고 고집세고 자기만 생각한다는 인식이 있거든요. 잘하고 멋있는 사람이지만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 디바죠.”
자신은 '그냥 일하는 사람'이다. “메트는 회사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여러 사람이 발을 맞춰 서로를 존중하면서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해야죠. 디바로서 취하는 사람도 이해가 가요. 소프라노가 완벽하고 잘해야지 티켓이 팔리죠. 티켓이 안 팔리면 그 오페라단이 망합니다. 성악가가 돼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목 관리하고 공부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잘해야 하죠.”
뉴욕메트로 오페라단에서 우뚝 서기까지 홍혜경에는 더 큰 난관이 있었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1972년 처음 미국에 갔을 때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어요. '(6·25 동란 때) 너희를 위해 싸워줬다' 등의 생각밖에 없고, 불쌍한 이미지였죠. 인종 차별을 많이 받았습니다. '무대에서 미국 남자가 어떻게 동양 여자를 사랑할 수 있어?'라는 인식이 컸죠.”
아시아인으로서 미국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노래뿐 아니라 모든 삶에서요. 노래만 잘하는 것보다 존경받을 만한 걸 가지고 있어야 했죠. 정정당당하지 않으면 영어로 싸워야 했어요. 지성적이지 않으면 눌림을 당하죠. 음악적인 목적도 중요했지만 사람으로서 내가 가야할 길, (성공하는데)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됐습니다. 아시아 여자가 서양 오페라를 하는 것이 신기하다면서 인터뷰도 많이 했는데 힘들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의 눈을 빨리 끌 수는 있었습니다.”
홍혜경은 4년 만인 12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메트오페라 데뷔 30주년 기념 소프라노 홍혜경 리사이틀'을 펼친다.
홍혜경의 메트 오페라 데뷔작인 '티토 왕의 자비'의 세르빌리아의 아리아로 시작한다. '라 보엠'의 미미, '리골레토'의 질다,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로미오와 즐리엣'의 줄리엣 등 그녀가 사랑한 배역의 아리아들을 노래한다. 메트 오페라의 피아니스트인 조너선 켈리가 함께한다. 음악가로서 지내 온 그간의 이야기들도 들려준다. "제가 한 경험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이런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4만~12만원. 크레디아 클럽발코니.
한편, 홍혜경은 21일 '2014 수원화성국제음악제' 폐막공연에서 수원시립교향악단(상임지휘자 김대진)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는 등 한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