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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인 이인제는 누구인가?

김부삼 기자  2007.10.16 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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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거인 이인제 경선 후보가 16일 민주당 1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 후보는 이날 오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후보 선출대회에서 당원 투표와 국민선거인단 투표, 여론조사를 합산한 결과 유효투표 6만576표 가운데 3만4천176표(56.42%)를 획득해 당선됐다.
민주당 17대 대통령 후보 이인제는 1948년 12월 11일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송산리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의 16세손이다.
이 후보는 유년시절을 지긋지긋한 가난과 함께 보낸다 논밭을 합쳐 3천평이 넘지 않는 소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이 후보는 어려서 10형제 가운데 넷을 병마로 잃었고 초등학교(논산백석초) 월사금도 한해 늦은 9살에야 어렵사리 낼 수 있었다.
그는 지독한 가난과 시련을 “시대의 운명”으로 수긍하고 “문명의 관점에서는 가난했으나 위대한 자연과 일체가 되어 성장한 어린 시절을 큰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이 후보는 그러나 어려운 형편에 굴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할 생각은 엄두도 못낼 상황에서 그는 "시험을 잘 봐서 5등 안에 들면 돈 없이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부모를 설득, 논산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된다.
중학교에 입학한 그의 향학열은 학교 도서관의 문학전집을 모두 통독하는 열의로 이어졌고 했고, 책이란 책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댔다. 그 때 소년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엄청난 충격파를 던져준 책을 접하게 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목숨을 바쳐 역사를 열어가는 영웅들의 삶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위대한 군인이나 정복자에 관한 책이라면 빠트리지 않고 읽었다. 그 때부터 이순신, 나폴레옹, 징기스칸이 내 마음의 영웅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군인이 되어 분단된 나라를 통일시키고 우리 민족이 대륙을 호령하는 시대를 열어보겠다는 꿈이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어느 사이 밀어내 버린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군인이 되기 위한 육사에 입학하기보다 법관이 되기로 선택한 그는 서울대 법대(68년)에 입학, 학생운동의 본산인 ‘사회법학회’에 들어가 정치사회적 모순들에 어떻게 대항하여 싸울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도시빈민 문제와 전태일 열사 분신 등 노동현안에 눈을 뜬다.
사회법학회는 민주당 이협 전의원과 최기선 전인천시장, 이신범 전의원, 장기표 씨,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 등 주축이었다. 대학생활 내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탓에 사법시험 공부를 하지 못한 그는 대학 졸업 후 시험을 준비했으나, 여의치 않아 군에 입대하게 된다. 1976년 육군 사병으로 전방 부대에서 근무하고 1978년 병장으로 제대한 이후 본격적인 고시 공부에 돌입해 사시 21회에 합격했지만, 동기생들보다 5-6년이 늦은 터였다.
사법 연수원을 수료한 후 그는 1981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직을 시작으로 법조인으로 첫발을 내딛었고 '영장기각률 70% 소신 판사'라는 꼬리표를 달게됐다. 1983년 말 판사생활을 끝내고 변호사로 나선 뒤 그의 소신은 사회정의를 위해 옥고를 치르게 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지원활동으로 이어졌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투옥된 사람과 근로자의 산재, 해고사건 등 노동 인권 관련 변호에 많은 시간을 투여함으로써 대학시절 갖게 된 믿음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이후 87년 격동하는 정치정세는 ‘변호사’ 이인제를 ‘정치인’ 이인제로 발걸음을 내딛게 만들었다. 6월 항쟁으로 온 국민의 민주화의 열망이 용암처럼 분출되던 그 해, 그는 제도정치권 진입을 결단하게 된다.
그의 정계입문은 1987년 9월 통일민주당의 민족문제연구소 이사 취임을 통해서였다. 당시 민주세력의 양대산맥인 동교동과 상도동 모두 인연이 있었으나, 주위의 권유를 받아 상도동 진영에 합류한다. 그러나 13대 대선을 앞둔 민주세력의 분열은 군부독재세력의 정권연장으로 귀결되는 참패를 낳았고, 경험이 없는 초보정치인으로서 특별한 기여를 하지 못한 한계를 절감하며, 88년 총선에 나서게 된다.
39세의 젊은 나이였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4.26 총선에 경기도 안양갑구(현 안양만안)에 출마,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국회입성에 성공한다. 깨끗하고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젊은이 이인제의 포부를 유권자들이 받아준 결과였다.
1988년에 열린 '국회 5.18 광주청문회'에 쏠린 국민의 기대는 상상 이상이었고, 그 기대만큼의 스타 국회의원들을 배출해냈다. 특히 국회 노동위원회 3총사로 불리며 맹활약을 펼쳤던 이인제 노무현 이해찬 초선의원 세 사람은 청문회 스타로 일약 국민적 스타로 급부상했고,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을 한껏 높이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청문회 스타와 당대변인으로 보여준 탁월한 재능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최연소 노동부 장관 발탁이라는 파격으로 이어졌고 그는 파격에 부응이라도 하듯 산업현장을 ‘발로 뛰는 장관’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이 후보는 이어 초대 민선 경기지사를 거치며 각종 개혁과제를 풀어나가는 탁월한 수완과 성과를 통해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1997년 3월, '정치의 명예혁명'을 슬로건으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 이 후보는 같은 해 8월 경기도지사직을 사임하고, '세대교체를 통한 변화와 창조', ‘기업하기 제일 좋은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국민신당 제15대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버스 한대로 전국을 돌며,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 같은 해 12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500여만 표를 획득했다.
이 후보는 1998년 9월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개혁이 대통령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안되며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새정치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의 합당에 동참, 평당원으로 백의종군의 길에 나섰다.
그는 1998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초청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국제정치와 국제경제 연구 및 미국내 정치, 경제, 과학계 전문가 및 정책입안자들과 교류를 통해 한미양국의 이해증진과 인맥을 구축해왔다. 5개월간의 미국 생활을 마친 뒤, 귀국길에 이탈리아 밀라노 첨단패션산업지역과 영국 런던 증권거래소, 프랑스의 산업현장 등을 비롯, 통일 독일과 일본 등을 거쳐 돌아왔다.
이 후보는 선거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 독자 출마하여 500만표를 얻은 97년 대선 뿐 아니라, 2000년 4월13일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새천년민주당이 영남지역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1위를 해 전국정당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은 지역구를 맡지 않은 채 비례대표로 의회에 진출해 왔던 관례를 깨고, 직접 고향인 논산금산지역구에 출마해 상대 후보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이어 지난 2000년 8월 30일 실시된 새천년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의 지지를 얻어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선거만 나서면 승승장구를 하는 이 후보는 이상하게도 조직과 파벌이 좌우하는 당내 경선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패해 2위에 머물렀고, 2002년에는 대세론에도 불구하고 경쟁자였던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는 쓰라린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 후보는 노무현 후보의 급진주의를 비판하며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 후 자민련에 입당한 그는 월드컵 휘장비리 사건, 이회창 대선자금 수수사건, 탄핵역풍 등 노무현 정권의 탄압과 구속, 불리한 정치환경으로 대단히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 시절에 대해 그는 스스로 ‘얼음속에 갇혀 지낸 세월’이라는 표현을 한다.
그 후 민주당을 나온지 4년 6개월만인 2007년 5월 국민중심당을 떠나 박상천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에 복당을 했다. 그는 복당의 변으로 ‘민주당 중심의 중도개혁세력 대통합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했으며, ‘2002년 당원들에게 진실을 고하지 못하고 탈당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민주당은 통합신당과의 통합과 분열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이 독자대선후보 선출한 뒤 후보단일화를 통해 한나라당과 양자대결구도로 가야 한다며, ‘혼란에 빠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이어 조순형 후보가 출마하자 아름다운 경선을 하겠다며, 도서관을 벗어나지 않던 조순형 후보와는 달리 버스투어를 하는 등 특유의 저인망식 선거운동을 펼쳐나갔다. 그의 선거운동은 그를 따르는 매니아층과 저돌적인 추진력을 바탕으로 했지만, 과거에 대한 깨끗한 사과와 정치적 부침에 대해 민주당 지지층의 동병상련의 감정이 결합되면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천 경선을 시작으로 거의 전 지역에서 50%가 넘는 고른 득표를 보이며, 저력을 과시했다. 그의 승리비결에 대해 그와 민주당 안팎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하려는 당원들의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뛰어난 자질과 검증된 도덕성과 강력한 권력의지가 꺼져가던 당원과 국민들의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