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27일 현대가(家)가 여수를 울렸다. 여수시민의 염원이었던 2012년 세계엑스포 유치가 여수 개최로 결정되면서 우리나라가 유치에 성공한 지구촌 3대 축제와 현대가의 인연이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 故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8년 서울올림픽을, 정몽준 의원은 2002년 월드컵 유치에 결정적 공헌을 했고, 이번 여수 세계엑스포 유치는 정몽구 현대 기아차그룹 회장의 활약이 1등 공신 책봉을 받을만 했다는 것이 정치권과 재계 안팎의 일괄적인 평가다.
정몽구 회장은 故정주영 명예회장의 장자이며, 정몽준 의원은 정 명예회장의 여섯째아들이다. 여수 세계엑스포 유치와 함께 현대가는 '민간 외교의 강자'라는 전통을 이어가게 됐다.
고 정 명예회장은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여 일본 나고야로 기울던 상황을 뒤집어 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서울의 승리는 81년 개최지 확정 회의가 열렸던 독일의 지명을 따 '바덴바덴의 기적'으로 불렸다.
정몽준 의원은 1996년 대한축구협회장으로서 한.일 월드컵 유치를 이끌어 냈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으로서 쌓은 다양한 인맥을 활용해 월드컵 공동 개최를 이뤘다.
정몽구 회장은 99년에 2010년 여수엑스포 유치위원장을 맡아 총력전을 펼쳤지만 중국 상하이(上海)에 고배를 마셨다. 이번에 명예 유치위원장으로 그룹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해 유치전에 다시 나섰다. 4월부터 6개월여 동안 여섯 번의 출장길에 올라 지구를 세바퀴나 도는 강행군을 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정 회장을 중심으로 엑스포 비상체제로 전환해 유치 활동에 그룹 차원의 힘을 쏟았다. 정 회장은 회사 내 회의에서도 경영 안건에 앞서 엑스포를 먼저 챙기는 등 여수 유치에 단호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8일 귀국한 정 회장은 "엑스포 유치는 국민, 정부, 유치위 모두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성과가 매우 좋았고 현대. 기아차그룹도 미력을 보탤 수 있어 보람이 있었다"며 "여수엑스포는 세계 140개국이 참가하는 세계적 행사이므로, 앞으로 계획대로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현대, 기아차도 전사적으로 도와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올릭픽, 월드컵, 엑스포 트리플 신화
현대가(家)가 2대에 걸쳐 세계 3대 이벤트로 꼽히는 올림픽과 월드컵, 세계박람회 유치라는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 신화를 일궈냈다.
부친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88 서울올림픽 유치에 결정적 공헌을 한데 이어 아들인 정몽준 의원이 2002 한·일 월드컵, 그리고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 2012 여수엑스포 유치에 공을 세워 이같은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 명예회장은 1981년,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여 일본 나고야로 기울었던 상황을 뒤집고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당시 정부조차도 정 명예회장 주도의 올림픽 유치단이 88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88올림픽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중심으로 경제인이 유치했다"고 적었다. 대한축구협회장을 겸하는 정몽준 의원은 1996년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으로서 활발한 유치활동을 벌인 끝에 '2002 한일 월드컵' 유치에 큰공을 세웠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96년, 현대중공업 고문이던 아들 몽준씨는 대한축구협회 회장 겸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으로 2002 한·일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어 다양한 인맥을 동원한 결과 월드컵 공동 개최에 이어 월드컵 4강 신화를 맛보기도 했다.
이어 현대가의 장자인 정몽구 회장은 여수엑스포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정 회장은 1999년에 2010년 여수엑스포 유치위원장을 맡아 총력전을 펼쳤지만 중국 상하이에 고배를 마셨다. 이번 여수엑스포 유치전에서도 이른바 '비자금 사태', '현대차 사태'에 따른 공판 등으로 공식활동을 자제하던 정 회장은 지난 4월부터 유치위 명예위원장으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펼쳤고 결국 지난 27일 2012년 여수엑스포 유치라는 선물을 품에 안았다.《자세한 내용은 시사뉴스 창간19주년 320호 특집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