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최근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들은 번듯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에서는 심각한 불균형과 체계적인 방치가 벌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령, 폭염 아래에서 쓰러지는 플랫폼 노동자, 통제에서 벗어나 범죄의 도구가 된 인공지능(AI), 그리고 현실을 외면한 채 규제에만 매몰된 탁상행정 등이 그렇다. 지금 정부와 국회가 방치하고 있는 세 가지 핵심 사회 문제가 있다.
노동 환경의 변화와 법적 사각지대
고용노동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플랫폼 종사자는 이미 88만 3,000명을 넘었다. 올여름엔 극단적인 폭염으로 인해 도로교통공단 집계 기준 이륜차 교통사고만으로도 388명의 소중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심각한 문제는 1953년에 만들어진 근로기준법이 아직도 ‘특정 사업장에 출퇴근하는 상근직 노동자’만을 보호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기상 악화 시 휴식 권고’ 안내문은 정작 현장에서는 공허한 메아리다.
배달을 멈추는 순간 알고리즘은 곧바로 배차 점수를 깎고 다음 일감을 줄이는데, 누가 감히 스스로 쉬겠는가. 고용노동부는 가이드라인 몇 줄 던져놓고 책임 다했다고 자위할 것이 아니라, 배차 알고리즘이 사실상 노동자를 지휘·감독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노동자를 항상 보호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유럽연합(EU)은 ‘플랫폼 노동 지침’을 통과시켜 올해 12월 2일까지 회원국 전체가 국내법을 바꾸기로 했다. 이 지침의 핵심은 ‘고용상의 추정’으로, 플랫폼이 실제로 노동자를 지시·관리한다면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이 근로자임을 입증해야 하고, 기본적으로 플랫폼 종사자를 근로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도 플랫폼 알고리즘의 노동 통제력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라이더를 마땅히 근로자로 간주하는 입증책임 전환법 도입에 속도를 내야 한다.
기술 발전(AI)의 부작용
올해 법조계와 금융권을 뒤흔든 사건들이 쏟아졌다. 3억 원대 사기 혐의를 받던 피의자가 AI로 은행 잔고증명서를 교묘하게 위조해 판사를 속이고 구속을 피했다가 나중에 덜미를 잡혔다.
최근에는 글로벌 대기업들이 최고재무책임자(CFO)의 목소리와 얼굴까지 똑같이 흉내내는 AI 딥페이크 영상 회의에 속아, 수백억 원을 잘못 송금하는 초유의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AI는 어느새 생산성을 높이는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범죄를 더욱 정교하게 자동화하는 위험한 촉매로 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AI 강국”이라는 화려한 구호만 내세울 뿐, 정작 기술이 야기한 문제를 통제할 시스템 구축은 뒷전이다. 위조 영수증, 허위 진단서, 딥페이크 피싱이 국민의 일상을 위협하는 사이, 과기정통부는 ‘자율 규제’라는 명분 뒤에 숨어 손을 놓고 있다.
EU는 ‘세계 최초의 AI 법률’을 제정해 8월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챗봇이나 딥페이크 같은 변조 콘텐츠에는 반드시 AI 생성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도록 ‘워터마크’와 ‘라벨링’을 의무화하고, 고위험 AI에 대해선 강력한 검증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 텍사스 등 일부 주를 중심으로, 올해 1월부터 AI의 차별적 행위를 금지하는 거버넌스 법안이 시행에 들어갔다.
민생 규제의 실효성
한국에서도 이제 생성형 콘텐츠의 투명성 공시를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새로운 규제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일례로 정부가 반려동물 가구의 부담을 덜어준다며 홍보에 나선 ‘동물병원 진료비 가격 공시제’는 불신만 불러오고 있다. 질병의 경중이나 처치 범위를 표준화할 가이드라인조차 없는 상황에서, 가격만 공개하다 보니 병원들은 방어적으로 진료하게 되고, 소비자들은 더 혼란스럽다.
또한, 전통시장을 활성화를 위한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 역시, 전통시장을 살리지 못했다. 오히려 알리, 테무 같은 이커머스 대기업들에게 시장의 주도권을 넘기는 결과를 낳았다.
날카로운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추진한 진료비 공시제는 수의학적 기준에 대한 최소한의 표준화도 없이 가격부터 공개하라며 현장에 혼란만 줬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고수하는 대형마트 규제도 유통시장이 이미 오프라인에서 모바일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시대에 뒤처진 정책이라는 평가다.
현장의 목소리나 이해관계자와 긴밀히 소통하지 않고, 관료들끼리 책상머리에서 수립한 제도와 보여주기식 성과주의가 반복되면서, 서민을 보호하겠다는 정책들이 오히려 독약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선의로 포장한 규제가 시장의 역동성을 죽인다면, 그건 더 이상 정책이 아니라 행정 폭력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