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유한태 기자] <산케이(産經)신문>은 정부 관계자 등을 인용해 “그간 ‘대항조치’라는 이름으로 검토한 대한(對韓) 경제제재가 7월 1일 발표된 뒤 같은 달 4일부터 정식 발동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구체적 제재품목도 꼽았다. △TV, 스마트폰의 유기EL 디스플레이에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반도체 제조 핵심부품인 리지스트와 에칭가스(고순도불화수소) 등 3개라고 설명했다.
앞서 6월 25일 본지는 일본 정부가 자국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에 경제제재를 가할 가능성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제기했다(‘日 “G20 한일정상회담 안 돼” 靑 재확인’ 기사).
그러나 당시에는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산케이신문> 보도 때도 단순 오보일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
현실화된 수출 규제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설마’는 ‘현실’이 됐다.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 규정을 개정하겠다”며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에칭가스 등 3개 품목의 수출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 가능한 물품 수입 허가를 면제해주는 국가 목록인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같은 달 4일에는 행동에 나섰다. 이날 0시를 기해 일본 정부는 3개 품목을 포괄 수출 허가에서 개별 수출 허가로 전환하는 규제를 발동했다. 또 “8월 중으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목록에서 삭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업계는 물론 정부도 비상이 걸렸다. 5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이틀째 3개 품목 통관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발표했다. 전날 일부 업체들은 수출허가 신청서를 일본 측에 제출했으나 허가를 받은 곳은 없었다. 산업부도 양자협의 요구서를 전달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앞서 3일 정부는 박근혜 정부 때 한일 합의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해산 첫 절차에 들어갔다. 하루 차이로 이뤄진 재단 해산, 수출 규제를 두고 우리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초월해 ‘보복’으로 규정했으나 일본 정부 입장은 달랐다.
“韓 수출 일본산 에칭가스, 北에 갔을 수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최측근으로 알려진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자민당 간사장 대행은 5일 <BS후지TV>에 출연해 “(에칭가스 등 한국으로 수출한 화학물질의) 행선지를 알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며 “군사 전용(轉用)이 가능한 물품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갈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7일에는 아베 총리가 직접 나서서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이날 BS후지TV 여야 당수 토론에 출연해 “한국은 ‘(대북)제재를 지키고 있다’거나 ‘(북한과의) 무역 거래를 제대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며 “하지만 징용공(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국제적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명확한데 무역관리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을 판결한 대법원은 16일 10억 원 상당의 한국 내 일본 기업 압류대상 재산 현금화 절차에 들어갔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끝났다는 입장이다. 아베 총리 발언을 두고 “북한 핑계 대더니 결국은 강제징용 배상, 재단 해산 등에 대한 보복을 인정한 것”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초당적 협력 나선 韓...국제사회도 “불합리” 日 규탄
정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8일 외교부는 에칭가스 등 북한 밀반출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9일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수출 규제 부당성을 가릴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우리 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결국에는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는 한편으로는 외교적 해결에 매진하고 있다. 12일 산업부 관계자들은 일본을 방문해 담판에 나섰다. 6시간 동안 강행된 회담에서 일본은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은 채 규제 장기화를 시사했다. 일본 측은 ‘설명회’라고 쓰인 A4 용지 한 장 붙여진 창고 같은 곳에 산업부 관계자들을 앉히는 결례를 저지르기도 했다.
국회는 초당(超黨)적으로 협력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국회 방일(訪日)단 구성에 합의하는 한편, 대통령과 5당 대표 회동 참석 의사를 나타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일본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의 2016년 10월 14일자 ‘부정수출사건개요’ 자료를 근거로 1996년 1월 일본에서 불화수소 50kg이 북한에 밀수됐다”고 폭로했다.
청와대도 나섰다. 김유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은 이날 “유엔안보리 전문가 패널 또는 적절한 국가기구에 한일 양국의 4대 수출 통제체제 위반 사례에 대한 공정한 조사를 의뢰하는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일본 내부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이번 규제를 두고 “불합리하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아베 내각의 승부수가 종래에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