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필자는 40년 넘게 중소기업을 이끌어온 한 기업인과 AI(인공지능)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저는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왜냐하면 평생의 짐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찾기 힘들던 유능한 경영기획실 인재가 바로 제 손안에 있습니다.”
그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생성형 AI였다.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 입장에서 실력 있는 기획 요원을 채용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고, 어렵사리 구해도 금방 대기업으로 떠나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 AI가 단 몇 초 만에 수준 높은 회사소개서, 경영 진단서와 제안서를 만들어주니 그의 표현대로라면 ‘AI 활용도 100%’의 신세계가 열린 셈이다.
이 장면은 AI가 우리 사회에 선사한 ‘빛’의 단면이다. 거대 자본과 조직을 가진 소수만이 누리던 전문적인 기획과 분석의 도구가 이제는 누구나 접근 가능한 ‘생산성의 민주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중소기업에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고, 개인에게는 1인 기업가로 거듭날 수 있는 날개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 찬란한 빛이 강해질수록, 그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 또한 짙고 시리게 다가온다. 며칠 후 만난 또 다른 지인의 하소연은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의 자녀는 국내 유수의 사립 명문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까지 마친 재원이다. 그러나 촉망받던 이 청년은 현재 취업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캥거루족’으로 머물고 있다. 이유인즉슨, 웬만한 산업디자인 초안과 그래픽 작업은 AI가 인간 디자이너보다 훨씬 빠르고 정교하게 해내기 때문이다. 전문 디자이너가 설 자리가 사라지며, 수년간 쌓아온 고도의 숙련과 학문적 성취가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비극이다.
비단 산업디자인 분야만이 아니라 세무, 회계, 경영컨설팅, 법률자문 등 사회 전 분야에 AI의 파고는 엄청 빠르게, 높게 전방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이러한 ‘전문직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은 대학 상아탑 안에서도 소리 없이 진행 중이다. 인문학을 전공한 노교수들은 이제 학과 통폐합이라는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 한숨만 내쉬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벚꽃 피고지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는 대학사회의 암운이 드리운지 벌써 10여 년이 넘었다. 여기에 거세게 밀어닥친 AI의 파고는 학과 폐지, 통폐합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과거에는 수십 년의 통찰과 독서가 있어야 가능했던 지식의 갈무리를 이제는 AI가 순식간에 해결해 준다. 전통 학문이 지켜온 ‘지식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인간의 실존과 가치를 고민하던 학문의 장은 취업률과 효율이라는 잣대 아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AI가 보고서를 써주고 디자인을 해주는 시대,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중소기업 대표가 누리는 ‘생산성의 해방’이 누군가의 ‘생존권 박탈’로 이어지는 이 불균형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필자는 이번 사태를 보며 우리가 지켜온 교육 시스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음을 직시한다. “공부만 잘하면, 석‧박사 학위만 따면 대기업에 취업하고 좋은 대학 교수되어 성공한다”는 식의 선형적 성공 공식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이제 교육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축적의 교육’에서 벗어나, AI라는 거대한 파도를 어떻게 타고 넘을 것인지 고민하는 ‘공존의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AI는 40년 경영인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지만, 동시에 청년의 꿈과 대학의 전통을 지워나가고 있다. AI가 보고서를 써주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그 보고서의 ‘양’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책임의 무게’와 ‘윤리적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
AI가 주는 매끈한 ‘답’에 매몰되기보다, AI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뜨거운 열정과 고유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AI의 시대는 분명 축복이자 저주다. 우리가 이 그림자를 외면하고 빛에만 취해 있다면, 우리 사회의 허리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제 국가와 교육 현장, 그리고 기성세대는 아우성치는 현장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AI가 앗아가는 ‘인간의 자리’를 어떻게 다시 정의하고 보호할 것인지, 그 실질적인 해법을 논의할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글쓴이=시사뉴스 박성태 대기자

배재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졸업 행정학 박사
전 파이낸셜뉴스 편집국 국장
전 한국대학신문 대표이사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