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년(庚子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한 해는 나라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이 아니듯 새해가 밝았는데도 새해가 아닌 것은 지난해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겁니다. 저마다 자기 주장만 하고 모두가 남 탓만 하다가 아까운 한 해를 넘겨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합니다. 한 시대 한 사회가 방향을 잃고 갈등의 골이 깊어갈 때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언론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했습니다. 우리 수도권일보와 시사뉴스도 이런 비판과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논쟁의 한복판에서 우리 언론은 냉정함을 견지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지 않고 논쟁을 확대재생산하고 부추기는 데 과도한 에너지를 쓴 것이 사실입니다. 갈수록 언론환경이 어렵다고 아우성입니다. 수도권일보와 시사뉴스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언론환경이란 언론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사를 읽지 않는 것은 읽을 만한 기사를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은 사람들이 기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고 푸념하지만, 기자의 신뢰도는 기
복학 후 대학 선생이 되어 보겠다고 진학한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까지 나는 주류로 살았다. ‘뺑뺑이’로 입학한 고교 시절에도 입학 성적이 좋았기에 당당했다. 대학원 때 학비 보조를 받기 위해 학과 사무실 조교를 한 일이 있다. 나처럼 본과 출신이 아닌 타과, 심지어 타대 출신은 근로장학금과 연계된 사무조교 자리조차 얻기 어려웠다. 나는 교수 연구실 조교 ‘낙점’이야 연구실의 ‘주인’인 교수가 하지만 사무조교만큼은 차별 없이 희망자에게 고루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타과 출신 여학생, 타대 출신 여학생과 셋이 교대근무를 했다. 석사학위 논문을 썼을 때의 일이다. 내가 사용한 커뮤니케이션학의 토착화하는 용어에 대해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도교수가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논문심사 주심을 맡은 그는 논문 발표회장에서 학문의 세계엔 일반화밖에 없다고 코멘트했다. 나는 논문을 인쇄할 때 토착화를 한국적 적응이라고 고쳐야 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지 않고 취직하겠다는 나를 말리는 선후배들에게 나는 “회사에 들어가면 사장에게 계급장 떼고 얘기해 보자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은사와는 안 되더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나이로 서른에 중앙일
서울고 3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교문 지도를 마친 우리 학교 선배 교사가 우리 반이 수업 대기 중이던 본관을 향해 걸어오는데 누군가 창밖을 내다보다 냅다 욕을 했다. 그 선생님이 그날 두발 단속에 걸린 학생들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어 고속도로를 냈기 때문이었다. 고3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실로 뛰어올라온 선생님은 욕을 한 학생을 잡아내려 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손을 들었다가는 죽음이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종례를 마칠 때까지 제 발로 찾아오지 않으면 “자동으로 3운동장 집합”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우리 학교엔 운동장이 셋 있었다. 제일 작은 3운동장은 복원된 경희궁 뒷산에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일제가 강점기에 철거한 경희궁 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반장이었던 나는 종례를 마친 후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어, 다녀갔어. 해산~” 다녀갔을 리 만무했다. 제자이자 까마득한 고교 후배에게서 공개적으로 쌍욕을 들은 선생님의 분이 그 새 풀린 듯 했다. 걸핏하면 군대식 단체기합을 받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학교는 ‘까라면 까는’ 상명하복의 병영 문화가 지배했다. 군사정부 하 고등학교와 대학엔 교련 과목이 있었고 교련시간이면 교련복을 입
1967년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왕십리의 무학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의 직장이 있던 뚝섬에서 가까운 왕십리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영등포구 오류동에서 태어나 줄곧 거기서 살았다. 오래 전 내가 태어난 이 동네를 찾은 적이 있다. 내가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오류국민학교, 내가 자란 오류동교회를 기준점으로 그 시절 하굣길을 되짚어 봤다. 내가 살던 집은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서울 사람들은 실향민이다. 고향을 찾아도 이미 옛 모습을 잃었기 때문이다. 전학한 학교의 우리 반은 100명이 넘었다. 2부제 수업을 했는 데도 그랬다. 말 그대로 콩나물 교실이었다. 지난 여름 인터뷰하기 위해 만났다 우연히 국민학교 7년 선배임을 알게 된 박용기 박사는 자기가 다닐 땐 3부제 수업을 했다고 들려줬다. 그 시절 나는 체구가 작았고 유약한 성품의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 서고 싶어 했다. 우리 반엔 손 아무개라는 아이가 있었다. 공부를 못했고 주목도 못 받는 요즘 말로 ‘찌질이’였다. 나이가 많은 남자 담임은 그 애를 발 아무개라고 불렀다. 막 전학 온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러는 담임이 유치해 보였다. 한번은 담임이 슬리퍼를 벗어 들어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황금돼지의 해' 기해년(己亥年)이 저물고 있다. 이맘 때면 한 해 동안 거둔 성과와 결실을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에 희망을 품게 마련이지만, 올 연말은 미래를 이야기하기에 당장 닥쳐 있는 현실이 녹록치 않다. 특히, 농업·농촌의 현실이 그렇다. 올해는 양파, 마늘 등 주요 채소류 가격이 연중 약세를 보였는가 하면, 아프리카돼지열병(ASF)과 통상 관련 이슈들까지 겹치는 등 혹독한 악재가 겹쳤다. 이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 농업·농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뤄가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올 한 해 우리 농정의 최대 불안 요소로 떠오른 이슈는 정부가 내린 농업 부문의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선언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0월 정부서울청사에서 “미래에 WTO협상이 전개될 경우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가 1995년 WTO에 가입한 지 24년 만이다. 농업계의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부 말대로 당장은 영향은 없을지 몰라도 향후 타결될 농업협상을 통해 농업 분야가 엄청난 타격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협상 결과에 따라 농업보조금과 주요 농축
[시사뉴스 오승환 경제팀장] 어쩌면, 기자로선 운이 좋은 날이었다.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던 내 앞에서 특종이 발생했으니까. “도와주세요!” 치한의 괴롭힘에 시달리던 여성은 구조요청을 했고 한 청년이 응답했다. 청년은 치한의 흉기에 찔리면서도 여성을 구했고 치한을 제압했다.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었지만 청년은 한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정의의 기사가 나타났다” LG그룹이 발 빠르게 나섰다. LG의인상 수여. 사회정의를 실천했다며 시민들을 대신해 청년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의인이 된 청년은 물론 LG그룹에까지 세간의 칭찬이 자자했다. “역시 LG가 잘 해.” LG는 그동안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에 공을 들여왔다. 그래서일까? LG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Brand Finance, 2019)’는 91위에 불과했지만 ‘글로벌 CSR 평판(Reputation Institute, 2019)’은 40위나 됐다. 우리나라 기업 중 가장 높다. 글로벌 브랜드 가치 5위로 우뚝 선 삼성이 CSR 평판에선 90위에 머물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미 있는 순위다. 이번호 커버스토
[시사뉴스 강영환 칼럼리스트]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기업은 어딜까? 1896년 서울 종로에 ‘박승직상점’으로 처음 문을 연 124세 두산그룹이 최고 어른이다. 우리나라엔 동화약품, 신한은행(이상 1897년), 우리은행(1899년), 몽고식품(1905년) 등 8개 기업이 생존해 있는 100세 이상 기업이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100년 이상 생존 기업은 일본이 3만3079개로 가장 많고 미국은 1만2780개, 독일은 1만73개에 이른다. 일본은 백제인 유중광이 578년에 창업한 사찰 건축 전문기업 ‘콘고구미(金剛組)’라는 1441세 나이의 최고령 기업도 보유하고 있다. 오래된 기업의 수가 적은 만큼 기업 평균수명 또한 우리나라는 길지 못하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집계에 따르면 국내 1000대 기업 평균수명은 28년에 그친다. 사정이 이러니 우리나라는 ‘30년 이상 된 기업’을 장수기업으로 칭한다. 이명래고약, 말표고무신, 도루코면도날, 캉가루구두약, UN성냥, 이태리타월 등의 토속 브랜드들과 이들의 제 조기업들은 명맥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그 명성은 대부분 추억으로 남아 있다. 1957년 설립된, 여성속옷 브랜드 ‘비비안’을 보유해 오랜 기간
[시사뉴스 오주한 기자] 인류는 오래 전부터 식수확보를 위해 ‘큰 강(江)’ 옆에 부락을 조성했다. 강 주변에 산다는 건 적잖은 리스크를 동반했다. 큰 비가 내려 강물이 범람하면 거주지는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수많은 익사자가 발생함은 물론 역병, 기아, 탁수(濁水. 식수오염)까지 겹쳐 시신이 산처럼 쌓이기 일쑤였다.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기록에는 ‘큰 홍수’가 재앙의 대명사 격으로 등장한다. 고대 치자(治者)의 가장 큰 임무는 제방건설, 수로(水路)건설 등 치수(治水)였다.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하(夏)나라의 건국자 우(禹)임금은 나라에 홍수가 나자 숭(崇)부락의 수령 곤(鯀)에게 치수를 맡겼다가 9년 간 실패하자 그를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대우치수(大禹治水)의 고사다. 물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건 곧 ‘죽을 죄’였던 셈이다. ‘치수의 결정판’ 수돗물이 없던 시기 강가에서 인류가 겪은 고통은 컸다. 육중한 물통을 들고 나르며 중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건 차라리 애교였다. 2008년 7월 조선왕조실록 등을 인용한 국토교통부 발표에 따르면 1729년 8월 함경도에서는 태풍에 따른 대규모 홍수가 발생해 무려 1000명 가까이 사망했다. 논밭이
[시사뉴스 오주한 기자] 지난 25일 차량에 다량의 ‘부탄가스’를 싣고 서울 종로구 주한(駐韓) 미국대사관에 돌진했던 30대 남성이 결국 구속됐다는 소식이다. 서울중앙지법은 29일 특수재물손괴 혐의로 입건된 박모(39)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 남성은 경찰 조사 당시“나는 공안검사다”“이미 다 보내놨다” 등 횡설수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형량을 덜기 위한 ‘연기’인지 정말로 정신질환자인지 알 수 없지만 미수에 그쳤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대사관 정문을 오가는 적잖은 내·외국인이 죽거나 부상당할 뻔했다. 일부 반미(反美)주의자들의 대미(對美) 테러는 건국 이래 꾸준히 시도되어 왔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2년 3월 17일 부산 미 문화원 방화(放火) 사건, 1983년 대구 미 문화원 폭발 사건, 2015년 마크 리퍼트(Mark Lippert) 미 대사 피습 사건이다. 리퍼트 대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조찬 행사에 참석하던 도중 우리마당통일문화연구소 대표를 자처한 김기종에게 피습당해 큰 부상을 입었다. 김기종은 평범한 참석자인 것처럼 위장해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날이 시퍼렇게 선 25cm 길이의 과도(果刀)를 꺼내
[시사뉴스 서태호 기자] 많은 국민이 깊은 고통과 분노 그리고 안전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던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지도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세월호 사고 이후에도 국민들의 높아진 관심과 기대치에 어긋나는 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해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고예방을 위한 국가기관의 안전규정 정비와 시스템 개선 등 문제점 보완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도 진행되고 있으나, 현재 해양수산부와 해경간 논의되고 있는 해상교통관제센터(VTS) 일원화도 사고 예방과 신속한 초기대응을 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당시 사고해역을 관할하는 진도연안VTS*에서 세월호 사고 사실을 즉시 인지하지 못한 사실과 해수부와 해경으로 이원화된 VTS 운영시스템으로 인해 사고초기 대응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문제점이 집중 조명되면서 2014.11.19. 해수부 소속 15개 항만VTS와 해경 소속 3개 연안VTS를 해경으로 통합․이관했다. 하지만, VTS 업무일원화 이후에도 관제사들은 현재까지 해수부와 해경으로 각각 나뉘어져 있는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일하고 있어 내부 분열 및 업무일원화 시너지 효과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
2019년 기해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돼지는 예로부터 복과 재물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그래서인지 내년도 키워드로 ‘돼지꿈, PIGGY DREAM' 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PIGGY DREAM'은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팀이 2019년 한국사회를 보여줄 키워드 10개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것입니다. 김 교수는 원자화·세분화하는 소비자들이 환경변화에 적응하여 정체성과 자기 컨셉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5G에 들어선 현재의 대한민국은 빠르게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으며,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응해 나가는지가 관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내외 환경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으로 대표되는 후발국과의 기술격차가 점차 줄어들고 있고, 아직 미국 등 선진국을 넘어서기에는 부족합니다. 또한 경제불황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외교적으로도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북핵 평화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주변 4강의 도움 없이 순전히 우리 힘만으로 풀어가기에는 녹록치 않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최저임금, 노동시간 등 어느한 쪽이 옳다고
너에게서 출발한 것은 다시 너에게로 돌아간다. (出乎爾者, 反乎爾者也. - 맹자편, 양해왕 하) ‘이열치열(以熱治熱)’이란 말의 유래는 한방의에서 감기 등으로 신열이 있을 때 취한제(取汗劑)를 쓴다거나, 한여름 더위에 뜨거운 차를 마셔서 더위를 물리친다거나, 힘은 힘으로써 물리친다는 따위에 흔히 쓰이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표현으로 변형(變形)이 되면, 내가 당한 것은 꼭 되돌려 줘야만 직성(直星)이 풀리는 여유 없는 심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요. 입장을 바꿔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만약에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나 행동에서 타인의 응분(應分)을 사거나 큰 실례를 저질렀다고 가정했을 때, 그 당사자의 심정은 과연 어떠한 마음일까요? 여기서 항상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실생활에 적용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문구를 해석해보면, 증자는 “네가 한 언행은 네게로 돌아간다. 즉 선에는 선이 돌아오고, 악에는 악이 돌아온다”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실로 ‘인과응보(因果應報)적인 삶의 전형적인 형태’로 보입니다. 즉, 이는 ‘노(魯)나라와의 싸움에서 추(鄒)나라 군대의 장교가 33명이나 전사했는데, 그 부하인 백성의 군대는 한 사람도 죽지 않았
(無罪歲, <斯天下之民至焉.> - 맹자편, 양해왕 상) 왕이 어진 정치를 베풀면 백성들은 그를 본받아 분수(分數)에 맞게 살 것이고, 그가 걱정하는 것처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해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나라를 오랫동안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맹자는 그만큼 왕이 패권주의(覇權主義)에 물들지 않고 중심을 백성들에게 두어 도덕정치(道德政治)를 베풀 때, 비로소 백성들도 인의(仁義)정신을 받들어 왕에 대한 무한 신뢰와 충성을 하게 된다는 가르침을 준 것이지요. 외부로부터의 침입도 없고 어떠한 적의 침공도 능히 무찌를 수 있는, 안으로의 단단한 결속력을 갖춘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 한들 흉년(凶年)이 들면 그 민심은 순식간에 흉흉해지며 도적과 불신, 시기세력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그나마 곳간의 곡식들을 강탈당하거나, 입에 풀칠할 정도가 되면 응당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지요. 문구를 해석해보면, “흉년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백성의 기아를 금년의 기후가 나빴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잘못이 흉년에 있다는 등과 같이 세월을 탓하지 않고, 그것을 왕 스스로의 책임으로 여기고 정치를 한다면 천하의 농민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왕의 치하로 모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