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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의 독립운동가 양한묵 선생

정춘옥 기자  2007.12.28 1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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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지강(芝江) 양한묵(梁漢黙) 선생을 2008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내년 1월1일부터 31일까지 민족전통관 제1전시관에서 개최한다.
1862년 4월 29일에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계리에서 태어난 양한묵 선생은 관군에 붙잡혀 능주에 압송된 많은 동학농민군을 구출하는 한편, 1895년 11월부터는 약 8개월간 능주에서 세무관으로 활동하였다. 189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파 인사인 조희연, 권동진, 오세창 등과 사귀며 세계열강의 정세를 살피고, 당시 일본에서 망명 중인 동학 교주 손병희의 영향을 받아 1904년에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4년 귀국한 후에는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여 보안회(補安會)를 설립하였고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해 설립된 공진회(共進會)에 힘을 보탰다. 1905년에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창립하고, 호남의 교육발달을 목표로 1908년에 창립된 호남학회(湖南學會)에서는 임시회장 및 평의원으로 선임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등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약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한편 선생은 초기 천도교의 핵심간부로 교단을 운영하며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고,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 등 천도교 교리서를 편찬하는 등 동학을 근대화하는데 매진하였다. 또한 교리강습소에서 천도교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많은 천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는 3·1운동 당시 많은 천도교인들이 앞장서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는 토대가 되었다.
1919년 2월 20일 권동진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전해들은 선생은 2월 27일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천도교계 민족대표 자격으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선생은 독립선언식 직후 일경에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지만, 선생을 심문하는 담당검사에게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당당히 밝히며 항일독립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선생은 1919년 5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옥중순국은 선생이 유일하였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