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가 무늬가 되도록 나는 사랑하고 싸웠다.’ 시대의 키워드로 떠오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작가 최영미는 첫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에서 지나간 연대의 내면을 이렇게 회고한다. 1960년대부터 2004년까지 정씨 일가의 가파른 삶의 궤적을 딸인 하경의 입을 통해 서술하고 있는 이 작품은 ‘언니의 추억을 빌린 나의 이야기’라는 소설 속의 문장처럼,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자 공동체의 운명 속에 선 한 개인의 역사다.
상처를 응시하다
소설은 거울을 보는 ‘내’가 얼굴의 흉터를 의식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과거와 현재가 엇갈리다 어느덧 사십대가 된 화자가 다시 거울 앞에서 희미해진 상처자국을 응시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혼을 앞둔 ‘나’는 폭식과 배설을 반복하던 어느날, 잊혀진 이름을 떠올리며 시간의 강을 건넌다. 1960년대 서울의 변두리에서 태어나 방송작가가 된 하경의 삶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사람은 언니와 아버지다. 불치병을 앓다 미국으로 입양돼 죽은 언니 윤경과, 한국전쟁에 참전해 실수로 부하를 죽였던 아버지 정일도는 그녀가 숨겨야 했던 과거다.
일정한 직장도 없이 사회 변방을 떠도는 아버지와 순진한 어머니에게서 성장한 네 딸들이 초라한 지붕 밑에서 힘겨운 생존을 이어나가던 1960, 70년대. 하경은 늘 기침을 하던 병약한 언니를 외면했다. 훗날 언니에 대한 기억을 말살했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하경은 언니를 글로 복원하기로 한다.
소설의 후반부는 1980, 90년대를 거치며 살아남은 정씨 일가의 현재를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에 반대한 미완의 쿠데타 ‘5-16반혁명사건’에 가담하며 투옥되는 등, 마흔이 되도록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던 아버지는 언니를 땅에 묻으며 생활인이 됐다. 세 딸들을 출가시키며 집은 없어졌지만 가족은 해체되지 않았다. 결혼한 동생들에게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새 생명을 돌보며 하경의 방황이 끝난다.
시적 문장 속에 박힌 철학적 경구들
‘잔치가 끝난 이후’ 10년만에 낸 ‘산문’에서 최영미는 가족의 이름으로 지나간 세대에 대한 성찰과 이해, 그리고 상실을 풀어낸다. 소설은 ‘시대가 다르고 깃발만 바뀌었지 아버지와 딸은 같은 궤도를 달렸다. … 비 오는 날을 대비해 허술한 우산도 준비하지 않고 시대의 광풍을 맨몸을 맞았다’고 이야기한다.
이 같은 아픈 기억은 서사적 흡인력과 간결한 시적 문장 속에서 살아난다. 특히 ‘치명적인 건 나중에 밝혀진다. 진실은 여러 겹의 옷을 입고 있다’ ‘오래된 고통을 다루는 법을 아는가? 침묵할 힘이 없으면 잘게 부수어 발설해야 한다.’ ‘정열은 고통에 비례한다.’ 등 곳곳에 박힌 철학적 경구들은 독자의 가슴 속에 강렬한 무늬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