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현저히 둔화됐다. 연평균 GDP증가율은 1991~1995년 7.5% 수준을 보였으나, 2001~2006년에는 4.5% 수준으로 크게 하락했다. 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성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기 이전 한국경제의 성장과정과 위기 전후 성장 둔화의 궁극적인 원인을 명확히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이에 한국경제연구원(KDI)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성과에 대한 보고서를 정리했다.
주로 요소투입의 둔화, 특히 자본축적 둔화에 기인
성장 둔화는 학계 뿐 아니라 정책 담당자들 사이에서도 그 원인에 관한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성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성장에 관하여 대략 두 가지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위기 이후의 성장이 지나치게 낮은 것이 아니라 위기 이전의 성장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위기 이전의 고성장은 정부가 재벌 및 금융기관에 제공한 암묵적 보증 하에서 이뤄진 ‘과잉투자’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은 외환위기가 위기 이전의 성장패턴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을 사후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다른 한 견해는 위기 이전의 성장보다는 위기 이후의 성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소위 성장잠재력이 지나치게 약화됐다고 보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 중 일부는 외환위기 이후 성장 및 투자율 하락이 재벌의 자본구조 및 지배구조에 대한 개혁조치, 적대적 M&A 시장의 개방 등과 연관돼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장회계 분석 결과, 경제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 둔화는 주로 요소투입의 둔화, 특히 자본축적 둔화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위기 이전 우리나라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뒷받침하였던 요소투입 증가세는 경제위기를 거치며 크게 둔화됐다. 특히 경제위기 이전 10% 내외의 높은 증가세를 기록하던 자본투입의 둔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질적 변화를 감안한 노동 증가율도 1991~1995년 기간의 연평균 4.2%에서 2001~05년 기간에는 1.3%로 하락했다. 반면 질적 변화를 감안한 자본 증가율은 같은 기간 연평균 11.6%에서 4.7%로 더욱 큰 폭으로 하락했다.
요소투입 증가세가 둔화된 것과 대조적으로 총요소생산성은 오히려 경제위기 이후 증가세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1991~1995년 연평균 0.8%에서 2001~2005년에는 2.0%로 높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경제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1960~90년 기간 동안 연평균 1.8% 내외로 추정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경제위기 이후 총요소생산성 증가세는 이러한 역사적 추세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다소 높은 편이다.
가격변수를 이용한 성장회계 결과도 경제위기 이후 성장 둔화가 총요소생산성보다는 자본축적 둔화에 기인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격변수를 이용한 성장회계에서는 자본임대가격 상승률과 실질임금 상승률의 가중합으로 총요소생산성을 측정하는데, 2001~2005년 기간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연평균 1.3%로서 1991~1995년 0.8%보다 다소 높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무리한 투자확대 정책보다 전반적 투자환경 개선 필요
여기서 주된 관심은 자본축적과 총요소생산성(TFP) 증가 중 어느 한쪽이 둔화된 것인지 아니면 둘 다 둔화된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특히 총요소생산성 향상 속도가 경제위기 이후 둔화되지 않았다면 이는 위기 이후 개혁으로 인하여 성장 잠재력이 ‘지나치게’ 약화됐다는 견해와 상충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기 이후 개혁은 한국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추진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경제의 위기 전후 성장성과를 국제 비교적 관점에서 평가해 보자. <표1>은 경제위기 전후 한국경제의 성장경험을 세계 주요 지역 및 국가와 비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할 점은 경제위기 이후 현저한 성장 둔화에도 불구하고 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률은 여전히 국제적인 기준에서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2001년~2004년까지의 연평균 노동자 일인당 GDP 증가율 2.9%는 여전히 대부분의 개발도상국 뿐 아니라 선진국에 비하여 상당히 높다. 사실 한국경제의 성장 둔화는 2000년 이후 전 세계 경제의 둔화와 함께 진행됐다. 여기에서 예외적인 국가는 중국과 인도(남아시아에 포함) 정도다. 이들 국가의 약진으로 인해 여전히 견조한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왜소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판단된다. 결국 한국경제의 성장 둔화의 원인은 부분적으로 세계경제의 성장 둔화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 이전 한국경제의 자본축적은 국제 비교적 관점에서 매우 높은 수준이었을 뿐 아니라 지속적이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경제위기 이전 수준과 비교하여 위기 이후 노동자 일인당 자본축적 속도는 절반 이하로 낮아졌다. 이러한 사실이 소위 ‘투자부진’에 대한 대중적 및 정책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한국의 위기 이후 노동자 일인당 자본스톡 증가율(연평균 1.3%p, 기여도)은 경제위기 이전에 비해서 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다른 지역들에 비해서 높은 수준이다. 중국의 경우는 물론 예외적이다. 2001~2004년 기간 중 중국의 노동자 일인당 자본스톡 증가율은 상당한 규모의 직접투자 유입에 힘입어 노동자 일인당 GDP 증가율에 대한 기여도 측면에서 연평균 3.6%포인트를 기록했다. 결국 한국이 자본축적이라는 관점에서 다른 지역 및 국가와 가장 현저히 구분되는 시기는 경제위기 이후보다는 경제위기 이전 시기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된다. 경제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자본축적 속도는 국제 비교적 관점에서 낮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다소 높은 편이다.
<표1>에서 특히 눈여겨 볼 점은 2000년 이후 자본축적 속도의 현저한 둔화는 한국경제에서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총요소생산성 증가세가 유지되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이라는 사실은 경제위기 이후의 개혁조치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성과를 나타내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향후 한국경제의 지속성장을 위해서는 기존 개혁조치의 전반적 방향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위기 이후 자본축적 속도의 둔화가 위기 이후 낮은 속도의 자본축적보다는 위기 이전 현저히 높은 자본축적 속도를 주로 반영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자본축적 속도를 이전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무리한 투자확대 정책을 펴는 것보다는, 전반적 투자환경 개선 등 시장인프라 개선을 통하여 자본축적이 효율성 향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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