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뉴스 이정희 기자] 굿은 우리 조상들이 즐겨찾았던 대표적인 무속신앙의 종교 제의다. 춤과 노래로 인간의 길흉화복 운명을 비는 의식으로, 전통 문화의 일부분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기도 한다.
7대째 세습무이자 강신무인 김문정 글문도사(본명 김희숙·55·부천)는 운명처럼 다가온 험난한 만신의 길을 걸으며 따스한 온기로 아픔 많은 사람들을 껴안으며 살아간다. 그는 자력으로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에 봉착한 사람들의 고통을 신(神)의 영력으로 치유하고 해결책을 제안해주는 영적 해결사이다.
제28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에서 전통민속문화대상 수상을 비롯, ‘시대의 大만신들’ 등 여러 프로그램에서 영검한 신(神)의 능력과 진실함으로 감사패를 받은 글문도사를 만나보았다. [편집자주]
김문정 글문도사의 일과는 오전 4시부터 시작된다. 상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신(神)에게 사연을 고하고 꼬인 문제가 술술 풀리도록 기도하며 정성을 다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내방자들을 만난다. 저녁에는 기도와 굿을 병행한다. 수면은 하루 3시간이면 족하다. 부천 심곡본동 624-2번지. 기도 공간과 상담 공간이 분리된 그의 공간에는 소원카드가 적힌 형형색색의 연등들이 가지런히 달려있고, 그 앞으로 기도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상담자의 얼굴과 몸만 보아도 뭐가 문제인지 보인다”는 글문도사는 상담자들이 자녀의 진학 상담과 취업문제, 배우자의 부정처럼 남에게 말못할 가정사나 경제적인 문제, 그리고 현대 과학과 의학으로도 설명이 안되고 치료가 안되는 병 등 각양각색의 사연을 갖고 찾아온다고 말한다.
글문도사는 일곱살 때부터 누군가에게 일어날 일을 예지몽으로 꿈꾸고, 또 그 사람의 미래가 보였다고 한다.
“연예인들도 가수와 탤런트, 예능을 함께 하는 멀티플레이어가 있듯 만신의 세계에도 멀티플레이어가 있는 거죠. 운명처럼 선거리와 앉은거리, 양거리(兩巨里)하는 무당이 되었고, 퇴마에 미래예측까지 하게 되었죠.”
반듯한 용모에 170㎝의 큰 키의 글문도사의 사무실에는 조선시대 문인의 풍모를 한 글문도사 인물화가 있다.
“모든 것이 인연이요, 운명인 것 같습니다. 신내림받던 날 초등생 운동회날 오재미로 큰 박을 터트리듯이 큰 박이 터지고 하늘에서 금색글씨로 쓰인 ‘글문도사’ 명패가 내려오는 환영을 보고 모셨지요.”
그때가 2004년. 내림굿을 받으며 눈과 뇌리에 새긴 글문도사 이미지를 전문가에게 맡겨 대형 화폭에 담아 중앙 벽에 잘 모셨다. ‘글문도사’라는 별호를 쓰자마자 특히 진학이나 취업 등을 고민하는 상담자들이 끝없이 줄을 섰다.
예지몽으로 마을을 놀래킨 아이
신(神)의 선택을 받은 것은 아주 오래전이다.
“일곱 살 무렵이었어요. 꿈에 외숙모가 돌아가신 거에요. 깜짝 놀라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어른들께 꿈 얘기를 했는데, 정말 그날 오후에 외숙모가 돌아가셨죠. 동네 흉사도 꿈으로 맞췄고, 사람 얼굴을 보면 미래까지 보여서 어른들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지요. 매를 맞기도 했죠.”
전남 해남 대흥사 인근에서 법당을 했던 친할머니는 손녀가 네 살 때부터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무속인이 되는 것만은 막고 싶어했다. 그래서 일찍 교회를 보냈다. 법당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막았다.
“예지몽을 꾸던 그때부터 의사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앓았어요. 눈과 귀가 늘 아팠고, 빈혈이 심해 일어설 수가 없었죠. 잘 먹지도 못하고 토하기 일쑤였고요. 결국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두달을 못넘기고 학업을 작파해 그 이듬해 후배들과 같이 초등학교 1학년을 다시 다녔어요.”
신내림을 막으려는 어른들의 성화로 33년간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성가대도 했고, 방언의 은사와 방언을 해독하는 은사를 받고 성령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대꼬챙이처럼 마르고 비실대자 그를 교회로 이끈 분까지 “이러다 사람 잡겠다”며 대걱정을 했다.
결국 37세에 이북 출신인 신어머니 명신암(고 유경심 만신)의 황해도 해주굿을 전수받게 된다. 또 할머니의 이남굿까지 전수받아 국내에 많지 않은 양거리 무당이 된다.

7세 이전 찾아온 신의 계시, 거부하자 시련 계속돼
군인이었던 선친은 살아생전 딸의 운명을 미리 알았던지, 예절범절과 글쓰기, 편지쓰기, 독서 등 꼼꼼하게 가르쳤다. 몸이 허약하니 자연히 책 읽고 사색하기를 좋아했다. 한문, 서예, 역사공부, 편지쓰고 일기쓰기, 그림그리기 등을 즐기던 그는 크면서 교내 글쓰기 대회나 어린이날 행사에서 장원은 도맡아 했다. 초등 6학년때는 독학으로 웅변대회에서 수상도 했고, 속독학원에 부탁해 3개월 무료 수강 끝에 1등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신의 계시에 항명해서 였을까. 그는 신병을 계속 앓았고, 집안은 더 어려워졌다. 아버지가 계속 사기를 당해 집안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글문도사가 중학생 때 군에서 휴가 나왔던 부친은 낚시를 갔다가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동행한 동네사람 세사람을 구하고 정작 본인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가세가 기울자 집안 살림과 동생들 수발은 그의 차지가 되었다. 한겨울에 꽁꽁 언 손을 호호 불며 빨래해야 했고 운동화와 실내화, 신발주머니를 아궁이에 말리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지금까지도 쓰고 있는 일기는 그의 인생을 조용히 말해준다.
“모든 걸 참고 견뎌야 했고, 살기 위해 못하는 게 없던 시절”이라고 회고한 그는 “집안 사정이 좋아서 부모님이 잘 이끌어주었다면 제 인생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라며 아쉬움 가득한 얼굴이었다.
400억대 사업 경영자에서 신내림받고 ‘글문도사’로 재탄생
글문도사는 내림굿을 받기 전까지 크고 작은 사업에 매진했다 한다. 대학 1학년 때 학비 마련을 위해 시작한 건강식품 판매를 비롯해 유치원 교사, 유치원 원장을 했고, 서울 삼성동 200평 남짓 공간에 피부미용, 경락 마사지, 헤어·메이크업, 네일아트, 헬스, 사우나 등 뷰티와 건강에 관한 원스톱쇼핑 사업을 했다. 마지막 사업은 400억원 규모였다. 처음에는 사업이 대박나는 듯했다. 그러나 결국 사업은 물론, 몸도 망가지면서 두손 들고 말았다.
“170㎝ 키에 38㎏까지 몸무게가 빠졌어요. 신내림만은 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불가항력이었죠. 결국 신어머니를 만나 37세에 내림굿을 받고 이 길로 들어섰어요. 신을 외면하니 결국 돈도 다 사라지더군요.”
신어머니와 시댁 할머니로부터는 황해도 이북굿을, 친할머니에게서는 전라도 이남굿을 전수받으며 남과 북 굿형식을 두루 익혔다. 아울러 어린 시절부터 눈으로 보아온 귀신들을 구분하며 그중 사람들에게 빙의해 해악을 끼치는 악귀들을 퇴마하기 시작했다.
일찍 계시가 왔던 대로 미래예측과 굿을 행했다. 보통 내림굿을 받은 무당이면 굿을 할 수 있다고 알려져있지만 굿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무당은 전체의 20% 정도밖에 안된다고 한다.
‘사람 괴롭히는 귀신’은 퇴마사가 퇴마의식으로 처리
‘퇴마의식’에 대해 물었다. 글문도사는 “귀신도 여러 종류인데, 나쁜 귀신일수록 기(氣)가 강하기 때문에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임한다”고 말했다. 귀신과 싸우다 자칫 퇴마사도 잘못될 수 있기 때문에 퇴마 시에는 심장을 조이듯 촌각을 다투면서 퇴마 의식을 행한다 한다.
글문도사의 주신(主神)은 7대 무당 중 할머니가 모신 신들과 할아버지가 모신 신들로, 때때로 이들이 합세해서 도움을 준다고 한다. 종종 상담자 중에는 잡귀신이나 색귀신, 또는 조상 귀신, 억울한 귀신 등을 달고 들어오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럴 때 귀신에 따라 식별을 하고 퇴마와 천도를 잘 해줘야 한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받는 상담자들도 많다. 그런 이들을 볼 때면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듯 가슴이 아려서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참 안타까운 사람들을 종종 만나요. 마치 부모 없이 태어난 것처럼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에게 예를 갖출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본인들도 복 받기 힘들지요.”
글문도사는 바쁜 맞벌이 직장인들이 조상 기일을 일일이 다 챙길 수 없을 때는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과 음력 9월 9일 구구제(九九祭)에 제사를 지내라고 권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앞서간 조상영가, 낙태유산된 영가, 객사 영가, 억울하게 죽은 영가 등을 기리며 제사를 올리면 좋다고 귀띰한다. 스스로 하기 힘들 경우,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글문도사는 리빙TV ‘시대의 大만신들’, ‘신퇴마록’, ‘점사의 달인’에서 영검한 신의 능력과 진실한 마음을 전달하는 만신으로 인정받아 각각 공로패와 감사패, 상패를 수여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제28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대회장 김한기)으로부터 전통민속문화대상을 수상했다. 또 ‘임경업장군 대제보존회 운영위’ 부위원장으로 공로상을 수상했고, 한국민속예술연구원으로부터 우리 민족고유 전통문화에 깊은 이해와 관심으로 기여한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다.
또 한얼문화예술제 및 팔도굿경연대회에 기여한 공로로 감사장을 받았으며, 한중 양국 불교문화교류에 공헌해 육조제봉행위원회로부터 공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진=김세권 기자 sw44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