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작가 설정식(薛貞植, 1912~1953)에 주목했다. 이번에 펴낸 『설정식 문학선: 해방의 문학, 청춘의 상상력』은 희곡, 논평, 대담, 소설을 중심으로 기존에 공개되지 않았던 설정식의 문학 자료들을 담고 있다. 엮은이의 상세한 해설을 더해 독자들이 설정식의 삶과 문학을 유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설정식, 격랑의 한국 근대사를 극적으로 살다 간 작가
설정식의 삶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1912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자란 그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 서울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경성공립농업학교에서 권고 퇴학을 당했다. 이후 중국, 일본을 거쳐 경성으로 돌아왔고, 연희전문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미국 마운트유니언대학과 컬럼비아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이어갔다. 해방 후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국내 최초로 완역하고 미군정청의 관료로도 활동하는 등 엘리트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지만, 미군정청에 몸담으면서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보였다. 또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도 결국 한국전쟁 중에 월북하여 휴전회담의 북측 통역관으로 등장해 충격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는 결국 1953년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사형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삶의 궤적 때문에 남북한 양측에서 오랫동안 잊힌 설정식의 문학은 이번 문학선을 통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90년 만에 빛을 본 등단작, 「중국은 어데로」
이번 문학선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설정식의 등단 희곡 「중국은 어데로」가 작가 약력 및 당선평과 함께 9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된다는 사실이다. 1932년 만주사변 직후의 중국 난징 외교부를 배경으로 한 이 단막극은, 일본의 침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빚어지는 첨예한 갈등을 다룬다. 설정식은 국제연맹에 기대를 거는 장제스와 교전을 주장하며 외교부로 진입하는 학생단의 갈등을 보여주면서, 흔들리는 중국의 미래가 지배 권력이 아닌 청년 학생들의 힘과 열정에 달려 있음을 부각시킨다. 또한 결말에 등장하는 ‘XX당원’의 목소리를 통해 일본은 물론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야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국제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동안 설정식은 식민지기에 영문학도로서 글을 썼을 뿐 이념적 입장은 뚜렷하게 표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일찍이 동아시아 약소민족 전체의 독립과 자존을 주장하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체제를 모색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의 그늘 뒤 ‘소설가’의 얼굴
설정식은 해방기에 세 권의 시집 『종』, 『포도』, 『제신의 분노』를 출간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소설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이번 문학선에는 설정식의 단편소설 「오한」과 「척사제조업자」가 실렸는데, 두 소설 모두 작가의 페르소나인 ‘박두수’가 등장하여 미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예리하게 꿰뚫어 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박두수의 눈에 비친 뉴욕은 돈이 없으면 바로 ‘인간 이하’로 전락하는 “화려한 지옥” 그 자체이며, 이러한 위계 구조와 배제의 원리는 민족과 인종을 불문하고 평등하게 적용된다.
또한 장편소설로는 「청춘」과 미완성작인 「한류·난류」가 수록되었다. 특히 이번에 실린 「청춘」은 1946년 『한성일보』에 연재된 것으로, 기존에 잘 알려진 1949년 동명의 단행본은 이 연재본을 수정해 완성한 것이다. 따라서 두 판본을 비교하면 설정식 문학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한류·난류」는 1948년에 『민주일보』에 연재된 설정식의 마지막 소설로, 미국의 자본주의가 일본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었음을 비판하면서 젊은이들의 연대와 실천을 강조한다. ‘재미국 약소민족 청년 반제국주의 동맹’이라는 조직을 통해 민족 해방을 전 세계 약소민족의 문제로 인식하는 트랜스내셔널한 감각은, ‘해방의 문학, 청춘의 상상력’이라는 책의 부제가 의미하듯 시대의 아픔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던 설정식의 열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미공개 자료 소개와 상세한 주석을 통한 설정식 연구의 새로운 시작
1980년대 말 해금 조치를 통해 월북 작가들의 문학 작품이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기림, 정지용 등 다른 문인들에 비해 설정식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2010년대 전반 『설정식 선집』(곽명숙, 현대문학, 2011)과 『설정식 문학전집』(설희관, 산처럼, 2012)의 출간은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했지만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2023년에는 설정식의 문학 전집이 유족에 의해 발간되어 더 많은 작품을 소개하는 성과가 있었지만, 학술적인 접근으로 나아가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미공개 작품을 포함하고 상세한 주석과 해설을 덧붙인 이번 문학선은 본격적으로 국문학계에서 설정식 연구를 심화하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