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미래도시에서 희망찾기
상처와 치유에 대한 한 편의 詩 같은 영화<나비>
인간의 존재는
기억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고민으로 힘겨워하던 모습을 상기해 본다면 이 말이 쉽게
수긍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을 모조리 지우는 것은 자기 존재를 완벽하게 부정하는 방법이 된다.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점철된 과거를 지닌 <나비>의 안나는 기억의 완전한 삭제를 위해 한국의 어느 도시에 왔다.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도시에는 잊고 싶은 기억만을 지워주는 ‘망각의 바이러스’가 있다.
안나를 안내하는 바이러스 가이드 유키와 고아 출신의 택시 운전사 K. 그들도 각각 안나처럼 상처를 지니고 있지만 그녀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출산을 고통으로 기억하는 안나와 달리 납중독에 임신 7개월째인 유키는 아기를 희망이요 기적이라고 부른다. K는 기억을 지우려는 안나와 반대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다.
그들은 닮은 듯 다른 서로의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간다. 상처란 단순히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통을 껴안고 타인에 대해
마음을 열 때 치유되는 것임을 안나는 점차 깨닫는다.
산성비가 줄곧 내리고, 납중독 환자가 득실대는 음울한 도시 분위기 사이에 감독은 양수처럼 아늑한 물 속, 갓 태어난 아기, 산성비를 씻겨주는
서로의 손길 같은 이미지들을 배치해 인물들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어두운 미래 도시는 서울의 낯익은 거리를 그대로 디지털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망각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도시는 “순간적인 자극만을 좇는
하루살이 같은 삶이 득실대는 서울”에 대한 비유라고 감독은 말한다. 감독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현재 서울에서 살아가는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인 것이다.
<나비>는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어 국내외 평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제5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는 신인배우
강혜정이 여우주연상을,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는 젊은 비평가상과 함께 김호정에게 여우주연상이 주어졌다. 안나역을 맡은 김호정의 섬세한 연기는
‘표정으로 많은 말을 하려했던’ 감독의 의도를 실현시켜 주었다.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의 변화에 대한 서사적인 설득력이 약하지만, 이 영화는 서사보다 이미지를 따라가는 즐거움이 강한 환타지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면 기억과 존재, 절망과 희망, 상처와 치유, 인간 소통에 대한 한편의 시를 읽은 기분이 된다.
인터뷰 |
“현재의 서울은 이미 디스토피아적이다”<나비>의 문승욱 감독
- 인물들을 무척 가깝게 조망하고 있다. 어떤 의도인가. |
스무살, 섹스말고도 할 말은 많다고양이를 부탁해
두 소년의 자전거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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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