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이발소는 다 어디로 갔을까?

2002.05.24 00:05:05



그 많던 이발소는 다 어디로 갔을까?


고속성장의 그늘과 상실에 대한 연극 ‘이발사 박봉구’



력적인 창작극 한편이 입소문을 타고 관객 몰이를 하고 있다.
동숭아트센터의 야심작 ‘이발사 박봉구’가 그것. 이 연극은 영화처럼 컨셉과 소재 선정을 먼저하고 수 차례 회의를 거쳐 대본을 짠 뒤, 스탭과
배우를 모은 ‘사전제작시스템’의 첫 작품이다. 그만큼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뜻으로 ‘야심작’이란 표현을 쓸만하다.

‘이발사 박봉구’는 제목만으로도 관객에게 이발소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큰 거울에 세면대, 단순한 원목 선반, 복제된 명화 정도가
유일한 장식품인 그곳.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사는 ‘헤어디자이너’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묵묵하고 성실한 외모다. 하지만, 이처럼 수수하고
평온한 이미지의 이발소는 추억 속에서만 아련히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공간이다.


변절을 강요하는 세상

소멸해 가는 이 시대의 이발소처럼, ‘이발사 박봉구’는 한마디로 ‘상실감’에 대한 연극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주 깡촌에서 이발사인 아버지를
보며 자란 박봉구는 이발은 용자(용모와 자태)를 다듬는 신성한 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훌륭한 이발사를 꿈꾼다. 우발적인 살인으로 11년간의
복역 후 출소한 박봉구는 세상이 급속도로 변했음을 깨닫지 못한다. 박봉구는 여전히 최고의 이발사를 꿈꾸며 미희이용원에 취직하지만, 퇴폐이발소인
그곳에서 이발사는 전혀 필요 없다. 박봉구는 자신에게 닥칠 시련을 ‘가위로 자르고, 바리깡으로 밀어내겠다’는 뚝심으로 꿈을 키워나가지만
세상은 냉혹하기만 하다.

박봉구의 삶은 비극적이고 처절한 결말로 치닫는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과 주인공의 절규가 직시하기 고통스러울 만큼 슬프고
답답하지만, 양념 같은 유머와 주옥같은 몇몇 대사, 훌륭한 연기 등 윤활유가 될만한 요소들을 적절히 배치해 대중성을 확보했다. 주제도 공감의
폭이 넓다. ‘꿈의 좌절’은 인생에서 대부분 맛보는 패배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도시의
생존방식에 비애를 느껴보지 않은 서민들도 별로 없을 것이다. 성장일변도의 세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구라는 별에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어”라는 박봉구의 대사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발맞추어야 하는 도시인들의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인간미를 버리고 속도와 물질만 쫓아가는
현대인들은 모두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셈. 박봉구는 따라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도식적 해석, 연기가 보완


수족관에 갇힌 채 방치된 메기, ‘앵두와 순이’ 전설, 혹독한 겨울을 피한 동면, 술집에서 보트를 타고 바다를 가르는 환상에 빠지는 장면
등 문학적인 상징과 설정도 돋보인다. 극단적인 내용이지만 서사적 연결과 배치에 공을 들여 작위적인 느낌도 거의 없다. 하지만, 신 개념
스타일리스트를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낸 부분은 주제에 대한 해석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퇴폐이발소와는 달리, 이발의
형태와 개념이 바뀌는 것 자체를 덮어놓고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비를 통해 메시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겠지만, 옛것과 새것을 선과
악처럼 선을 그어버리면 많은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박봉구 또한 빌딩과 주식회사라는 현대적이고 물질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주로 가자는
은영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가.

초점은 앞만 보고 달린 사이 소중한 가치들을 잃고 있다는 것인데, 박봉구의 꿈과 집념을 거듭 강조한데 비해 아름다운 ‘옛것’에 대한 상기는
부족한 편이다. 빠르게 변하는 불순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념만 고집하다 패배하는 한 인간의 비극적인 삶은 비장미가 넘치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상실한 가치’ 자체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지난 시절 이발소가 가져다주던 훈훈하고 소박했던 정서를 떠오르게 할
것”이라는 홍보문구는 극의 구조 속에서는 적극적으로 실현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쉬운 점을 한가지 더 지적한다면, 꿈의 좌절이나 고도성장의
이면에 상처받는 인간상 등은 소설과 영화에서 너무 많이 반복된 주제라는 것도 감동을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허점에도 불구하고 ‘이발사 박봉구’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특히 연기자들의 열연이 연극을 빛내고, 감정이입을 유도하는데 한몫
한다. 주인공 박봉구를 맡은 정은채의 인물 묘사는 탁월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알려진 박원상의 양아치 연기와 관객들로부터 웃음을 끌어낸
오용의 감칠맛 나는 연기도 인상적이다. 여주인공 심은영을 맡은 신인 이승비도 매끄럽게 역을 소화했다.









인 터 뷰

“박봉구는 싫다. 나와 너무 닮아서”


꿈을 좇는 우직한 청년으로 분한 배우 정은표의 ‘연기 열정’


순박하고
친근한 외모로 무대와 텔레비전, 스크린을 넘나드는 배우 정은표(36). 최근 ‘행복한 장의사’ ‘유령’ 등의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얼굴이 많이 알려졌지만, 연극판에서는 10년 넘는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연극반을 담당했던
여선생님의 미모에 반해 연극을 시작했다는 그는 ‘백마강 달밤에’‘비닐하우스’ ‘태’ 등 20여편의 연극에 출연하며 동아연극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세상에 순응할 줄 모르고 한 가지 꿈에 집착하는 박봉구가 나와 너무 닮아서 한편 탐탁하지 않아요” 그는 주인공 박봉구에게서
20년 넘게 연기만을 고집해왔던 자신을 보았다고 한다. 객관적인 잣대로는 배고프고 고달픈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명시절은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힘들지 않았어요. 행복한 시간이었죠. 흐트러지지 않고 중심을 지키고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내 연기에 만족한 적 없다”

영화 ‘킬리만자로’로 작년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개봉예정작 ‘4발가락’ ‘내추럴시티’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 출연중이다. 이처럼 다작에 방송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던 그는 특별히 선호하는 장르나 역할이 있지 않을까? “다 좋아요”
그는 어떤 장르나 역이건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고 강조한다. 덧붙여 “매체의 특성상 설레임은 연극무대에 섰을 때 가장 크다”며
첫사랑인 연극에 대한 애정을 엿보이기도 했다.

우노필름의 차승재 대표가 “한마디로 다른 건 볼 것 없고 연기력만 보이는 배우”라고 말했을 정도로,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는
그이지만,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내 연기에 만족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연기라는 것이 1, 2등도 완성품도 없는 것
아닙니까. 배우로서의 좌절감을 항상 느끼지요” 그래서 그는 앞으로도 “열심히 사는 것”만이 계획이다. 더 좋은 연기를 위해 끝없이
노력하겠다는 의미다.

이외에 ‘눈에 보이는’ 목표가 하나 더 있다면, 결혼이 아닐까. “예전에는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돈이 없었죠. 제가 촌놈이라
책임감이 강하거든요. 지금은 책임은 지겠는데 여자가 없네요”라며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그는 “내일 공연에 선생님이 오신다”며
들떠있었다. 선생님이란 그를 배우의 길로 이끈 미모의 연극반 교사를 말한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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