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19세기 폴란드 립세 마을의 사계절을 배경으로 야그나와 마을 사람들의 격정적인 욕망과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그렸다. <러빙 빈센트> 감독의 두 번째 유화 애니메이션이다. 2023년 폴란드 개봉작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토론토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으로 상영됐다.
사계절이 흐르는 동안
1800년대 말 폴란드의 평화로운 작은 마을 립세에 사는 야그나는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다. 어머니의 강요로 마을 최고 부유한 농민 보리나와 결혼했지만 자유를 갈망한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인 보리나와 다투는 안테크, 그리고 땅을 지키기 위해 지주와의 싸움을 시작한 마을 사람들까지, 립세의 사계절이 흐르는 동안 모두의 욕망이 점차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전 세계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로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과 제75회 골든 글로브 후보에 오르며 화제를 모았던 DK 웰치먼과 휴 웰치먼 감독은 두 번째 작품으로 폴란드의 국민 작가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의 장편 소설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농민>을 바탕으로 한 대서사를 선택했다. 원작 소설인 <농민>은 1년 동안 벌어지는 마을에서의 공동체 생활과 자연에 대한 묘사, 인물들의 도전적인 투쟁, 그리고 그 속의 애틋한 순간과 가슴 아픈 비극까지 담겨있는 장엄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폴란드의 모든 학교에서 필수로 배울 정도로 국민적인 소설인 이 작품을 DK 웰치먼과 휴 웰치먼 감독은 마을 립세에서 펼쳐지는 야그나와 마을 사람들의 욕망과 운명의 소용돌이를 다룬 이야기로 새롭게 해석했다. 작품을 통해 여성의 투쟁과 열정, 강인함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DK 웰치먼 감독은 야그나의 자유에 대한 열망과 그럼에도 피할 수 없었던 운명에 결국은 맞서고자 하는 의지를 세심하게 그려냈다.
30인의 명화를 유화 페인팅으로 재현
1,000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역동적인 춤, 웅장한 전투 장면 등을 표현하기 위해 <리빙 빈센트>에 비해 두 배의 촬영 시간이 소요됐다. 100여 명의 아티스트들을 동원해 세계적인 화가 30인의 명화를 구현하는 등의 대형 작업 또한 총 25만 시간을 소요해 제작했다. 페인팅 아티스트들이 폴란드, 세르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네 개의 스튜디오에 투입되어 전작 <러빙 빈센트>를 위해 특별 제작한 ‘PAWS(페인팅 애니메이션 워크스테이션)’을 통해 작업하는 방식의 거대하고 압도적인 규모의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작품 속의 모든 캐릭터를 배우가 직접 연기하는 제작 방식으로 높은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실제 장소와 비슷하게 특수 제작된 세트 혹은 컴퓨터 애니메이션과 무광택 그림을 합성한 그린 스크린이나 언리얼 엔진으로 제작한 립세 마을을 배경으로 촬영해 배우들이 현장감을 느낄 수 있게 도우며 완성도를 더했다. 이러한 작업을 마친 이후 페인팅 애니메이터들이 실사 촬영 영상 위에 샷의 첫 번째 프레임을 페인팅한 뒤 움직이는 모든 부분에 대해 이전 프레임의 설정과 일치시키고, 컷에 애니메이션을 적용하고 각 프레임을 캐논 6D 디지털 스틸 카메라의 6k 해상도로 녹화하는 방식으로 공을 들여 완성했다. 초당 12프레임부터 4프레임까지 다양한 유화 컷들이 모여 영화가 탄생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헤우몬스키의 ‘인디언 섬머’ 등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거장의 작품이 스크린 위에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장면은 관객에게 명화를 오감으로 체험하는 황홀한 경험을 선사한다. 감독은 영화의 원작 소설가인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가 ‘영 폴란드(폴란드 미술공예운동)’ 작가라는 사실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화 화가들의 그림을 작품과 연결 지을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특히 사실주의 학파인 헤우몬스키의 작품을 다수 인용했는데 그의 후기 작품 속 연민이 깃든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폴란드의 시골은 <립세의 사계>가 추구하는 시각적인 방향성과 일치했다. 원작 소설의 분위기를 영화 속에 생생히 담아낼 수 있도록 영감 받은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19세기 마을과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