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은 남의 일일까?

2008.09.01 09:09:09

20년 동안 110여 편의 노동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노동자뉴스제작단이 극영화 제작을 위해 설립한 ‘그리고 필름앤드라마’의 첫 장편 극영화가 8월 22일 인디스페이스 단독 개봉으로 최초 극장 상영의 기록을 세웠다. ‘안녕? 허대짜수짜님!’은 현대자동차노동조합과 공동제작으로 노동자들이 직접 기획, 제작, 출연한 영화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삶과 사랑, 가족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그려낸 노동자 가족 드라마다.
그 놈이 그 놈이었다
현대자동차 대의원에서 조합의 간부까지 두루 걸쳐 활동을 했고, 지금은 대의원 대표로 안정적이고 잘나가는 정규직 노동자 허대수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욕심 많은 마누라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외동딸 연희가 있는 안정된 가정, 이제 곧 정년을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몇 년간 별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 있다.
그는 그 무엇보다 직장에서 자신의 이름 앞에 항상 뭔가가 붙는 삶이 참 좋다. 소의원 허대수, 대의원 허대수, 노조 조직부장 허대수, 대의원대표 허대수 등이 그것. 항상 누군가를 위해서 사는 삶에서 그는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허대수와 같은 라인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박세희는 불안하다. 공부하는 동생들이 2명이나 있고, 병든 아버지가 있고, 결혼하고 싶은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회사에서는 신차투입과 함께 인원감축에 나서서 언제 짤릴지 모른다.
같은 라인의 정규직 대표 대의원 허대수와 함께 인원감축에 저항에 싸워보지만, 그나마 허대수는 회사와 비정규직 20명을 자르는 선에서 합의를 해버리고 만다. 정규직과 허대수에 대한 미움 속에서 아무리 힘을 내보려하지만,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살얼음판이다.
허대수는 자신이 합의한 내용에 반대해서 싸우고 있는 같은 라인의 박세희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하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하겠다는 딸의 이야기를 듣게 된 허대수. 그리고 비정규직 20명을 자른 것으로 마무리된 인원감축 협상을 조합원들에게 보고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날 밤. 바로 그 놈이 그 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획 장편독립영화 부활 알리는 노동영화
‘안녕? 허대짜수짜님!’은 기획 장편 노동영화의 부활을 알리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파업전야’의 맥을 잇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90년 제작된 독립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 ‘파업전야’는 운동적 필요에 의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돼 당시 사회운동을 토대로 한 제작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졌다. ‘파업전야’는 제작방식과 작품성, 배급사례에서 1990년대 장편 독립영화 운동을 대표하는 성과다. 그러나 파업전야를 제작했던 장산곶매가 1994년 해체되면서 제작과 배급의 노하우를 독립영화 진영에 남기지 못했다. 극영화 진영의 진보적인 역량의 재생산이 단절되고 말았다. 동시에 기획장편독립영화 운동도 사실상 단절되었다.
‘안녕? 허대짜수짜님!’은 감독을 중심으로 한 개인 창작자들의 노력으로 그 개인의 예술적 성취가 가장 주요한 목표가 아니라,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집단적 이념적 목표를 갖고 기획제작 됐다. 이런 점에서 ‘안녕? 허대짜수짜님!’은 ‘파업전야’가 남겨준 성과를 잇는 기획 장편독립영화의 부활이다. 노동영화로는 드문 극장 상영작이 된 이 작품은 또한 변화된 시대에 맞게 노동자의 이야기와 계급투쟁을 대중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노동자뉴스제작단의 고민이 엿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한 가족을 통해 비정규직의 문제를 들여다보고자 한 점도 이 같은 고민의 연장선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영화는 그래서 코믹하고 드라마틱한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재미는 비정규직 문제를 ‘내 이야기’로 끌어들인데 핵심이 있다. 무엇보다 솔직한 진정성이 담겨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88만원 세대의 고민 담아
사실 한국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단지 남의 일이 아니다. 전체 노동자의 54%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설사 내가 비정규직이 아니라도 내 자녀는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 현실이다. 사회 첫걸음을 내딛는 대다수 한국의 젊은이들의 미래는 밝지만 않다. 또 하는 비정규직의 현실은 잘만 피해가면 닥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확률의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그 무엇이 아니라도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과 우리는 같이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영화는 그런 고민에서부터 시작됐다.
한국 최대의 공장이며 동시에 최대의 민주노동조합으로 불리는 현대자동차를 배경으로 한 것도 재미있다. 현대자동차 정규직노동자가 비정규직의 문제를 만나가며 겪는 좌충우돌의 모습을 생생하게 다뤄 영화는 다큐와 논픽션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 듯한 인상도 준다. 비록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지만 카메라는 현대자동차 공장 안 곳곳을 담았다.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모습, 휴식시간에 족구하는 모습, 노동조합 사무실, 노동자들의 회의실 등 노동자들 일상생활 공간도 만날 수 있다. 처음 기획됐을 때 현대자동차 내부에서는 노조의 사내방송용 영화였던 ‘안녕! 허대짜수짜님!’의 태생이 엿보이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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