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돋보기】 기다림과 공포, 그리고 끝까지 버텨보려는 시간 <힌드의 목소리>

2026.04.20 09:34:48

기록을 넘어 기억이 될 ‘증언’

 

 

[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한 아이의 마지막 기록을 통해 세계가 외면해 온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튀니지 출신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가 연출한 튀니지-프랑스 합작 영화로 ‘제98회 아카데미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부문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했고, 골든글로브 시상식 비영어영화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문서화된 사건과 체험된 현실 사이

 

2024년 1월 29일, 가자지구에 대피 명령이 떨어진 날 6살 소녀로부터 1통의 신고가 접수된다. “나한테 총을 쏘고 있어요, 제발 데리러 와 주세요.”

 

적신월사는 구조대와 단 8분 거리에 있는 ‘힌드’를 구하기 위해 조정 절차를 이어가지만 구조 작전은 무려 5시간 동안 이어진다. 영화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한 아이의 마지막 구조 요청에서 출발한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숨진 여섯 살 팔레스타인 소녀 힌드 라자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가족과 함께 피난하던 중 차량 공격을 받아 홀로 남겨진 힌드가 팔레스타인 적신월사에 구조를 요청하며 남긴 실제 전화 음성 기록을 중심으로, 그녀의 마지막 몇 시간을 재구성한다.

 

감독은 힌드의 짧은 음성 클립을 처음 들은 순간, 그 목소리가 단지 한 아이의 절박한 외침을 넘어 “도움을 요청하는 가자 자체의 목소리”처럼 다가왔다고 말한다.

 

이후, 팔레스타인 적신월사를 통해 70분이 넘는 전체 녹음을 접한 그는, 기다림과 공포, 그리고 끝까지 버텨보려는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 앞에서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됐다. 힌드의 어머니 위삼, 그리고 사건 당일 통화 반대편에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애썼던 적신월사 자원봉사자들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누며 영화의 토대를 쌓았다.

 

무엇보다 그는 힌드의 어머니의 동의가 없었다면 영화는 결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감독에게 이 작업은 단순히 사건을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한 아이의 목소리를 지우지 않기 위한 윤리적 약속이자 기억의 보존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서 가족의 신뢰와 지지는 영화의 방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됐다.

 

영화는 힌드의 목소리를 정서적 중심에 두면서도, 그녀를 구하기 위해 통화 반대편에서 분투했던 적신월사 자원봉사자들의 시선을 따라 전개된다. 감독은 실제 라나, 오마르, 마흐디, 니스린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기억하고 있던 것은 “무슨 말을 했는가”보다 “그 순간 무엇을 느꼈는가”였다고 말한다.

 

이 지점은 영화의 형식을 결정하는 핵심이 됐다. 실제 녹음이 영화의 사실적 뼈대를 이룬다면, 이들의 증언은 공포와 무력감, 혼란, 그리고 끝까지 행동해야 한다는 절박함이라는 내면의 감각을 채워 넣는다.

 

그렇게 <힌드의 목소리>는 기록된 사실과 살아낸 감정, 문서화된 사건과 체험된 현실 사이를 오가는 영화로 완성됐다.

 

 

극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

 

감독은 이번 작품을 특정 장르로 단정하기보다, 극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끝까지 밀어붙인 영화로 설명한다. 분명 대본과 연기를 통해 구성된 극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힌드의 실제 목소리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비극 위에 단단히 놓여 있다.

 

감독에게 이 작품은 무언가를 새롭게 발명하는 작업이 아니라, 기억과 슬픔, 실패의 감각을 영화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었다.

 

<힌드의 목소리>의 또 다른 특징은 배우들의 날것 같은 존재감이다. 촬영 당시 배우들은 자신이 연기하는 실제 인물이 당시 힌드에게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반복했으며, 이어피스를 통해서는 원본 녹음에 담긴 힌드의 실제 목소리를 듣고 연기했다.

 

배우들 모두가 팔레스타인 출신이었고, 다수의 엑스트라 역시 같은 배경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 영화는 단순한 역할 수행을 넘어 개인적·역사적·정치적으로 깊이 맞닿아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현장에서는 연기와 목격의 경계가 흐려지는 듯한, 특별한 긴장과 침묵의 분위기가 형성됐고, 이는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담겨 강렬한 현실감을 만들어낸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제작자 제임스 월슨이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 브래드 피트, 호아킨 피닉스, 루니 마라 등 현대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총괄 제작으로 이름을 올렸다.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은 이번 작품으로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세 차례 노미네이트된 최초의 아랍 여성 감독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앞서 <피부를 판 남자>(2021), <울파의 딸들>(2025)로 아카데미시상식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정춘옥 sisa-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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