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인문학] 율곡 묘소, 무욕의 소탈한 삶 반영

2018.07.14 21:35:31

이장하며 파간 자리에 묻히며 역장(逆葬) 감행


[시사뉴스 정승안 교수] 세계적으로도 그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은 그 나라 화폐의 표지 얼굴로 채택된다. 율곡과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오천원권과 오만권을 차지할 정도로 한국사회의 상징적인 민족지성을 대표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들어 급진전되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와 대화무드는 북미간의 관계개선과 등락을 거듭하고 있지만 대화 국면의 도래는 통일이 임박했음을 느끼게 한다. 통일시대에는 공통의 정서와 사회사상에 기반한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교류와 소통을 통한 공통된 사회의식과 공감을 위한 다양한 방식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하나의 민족이라는 공통분모와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한 민족으로서의 역사성을 공유하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사회사상적 조명을 통해 공통의 사유방식을 살펴보고, 오늘날의 삶과 생활의 지혜로 재조명하는 일이 더욱 요청되고 있다.


조선 중기 임진란을 전후한 시기는 조선에서의 사회사상의 춘추전국시대였다고 칭할 정도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또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며 공론장을 형성했는데, ‘삼현수간(三賢手簡)’으로도 널리 알려진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 세 사람이 30여 년 동안 서간을 통해 학문과 삶의 이야기를 공유한 기록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교류와 공감, 소통에의 의지는 오늘날의 짧고 단편적인 SNS의 그것과 비교된다.


통일시대에 재조명해야 하는 대표적인 민족 지성, 율곡 이이(栗谷 李珥)


통일과 더불어 남북한의 공통된 민족지성으로 부각되고 있으며 기억해야 할 조선의 대표적 인물은 단연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를 손꼽을 수 있다. 경기도 파주와 황해도 해주 일대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조선성리학이 정주학(程朱學)파의 기계론적인 해석을 넘어서 독자적 한국의 성리학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율곡의 기여는 후학들이 ‘동방의 성인(東方之聖人)’이라고 칭할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이후 제자들을 중심으로 기호학파가 형성되었는데 한국지성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1682(숙종8)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율곡(栗谷)의 아버지는 강평공(康平公) 명신의 5대손인 이원수(李元秀)이시며 어머니는 시서화의 3절이라고 격찬받는 사임당(師任堂) 신(申)씨이다. 율곡은 어려서부터 현모이며 스승인 어머니 슬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출생하던 날 밤 어머니의 꿈에 흑룡이 집으로 날아오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아명을 현룡(見龍)이라고 하였다. 잉태되던 방(産室)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이미 8살에 파주 율곡촌의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지은 시가 유명한데, 13세에 과거(진사과)에 급제하였다.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紫雲山) 기슭에 장례지내고 3년동안 묘막생활을 하며 시묘(侍墓)하였다. 상복을 벗자 말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공부했다. 다들 불교에 매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氣)론을 중심으로 하는 단학수련에 전념하셨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년여를 수행에 전념한 후 서울로 돌아오는 중에 강릉 오죽헌에서 경전을 읽는 것에 전력하였다. 이때 지은 ‘자경문(自警文)’ 십일조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도 마땅히 새겨 익힐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제 1조,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도덕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立志).
제 2조, 마음을 결정하는 데는 먼저 말을 적게 해야 한다(寡言).
제 3조, 놓아버린 마음을 걷어 들여야 한다(久放之心).
제 4조, 홀로 있어도 마땅히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戒懼愼獨).
제 5조, 일보다 생각이 앞서야 하며 실천이 없는 독서는 무용의 학문이다(有事則必思).
제 6조, 재리(財利)와 영리(營利)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제 7조, 할 만한 일이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제 8조, 온 천하를 위해서라도 무고한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제 9조, 아무리 횡포한 사람이라도 감화시켜야 한다.
제10조, 때아닌 잠을 경계해야 한다.
제11조, 수양과 공부는 완급(緩急)이 없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율곡은 21세에 강릉의 외조모를 떠나 서울로 온다. 그 해에 한성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22세에는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례를 치른다. 23세에 처가에서 강릉으로 가는 도중에 당대의 석학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 그해 겨울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와 별시에 합격하는데, 이때의 유명한 답안이 바로 ‘천도책(天道策)’이었다. 이로부터 29세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이른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퇴계 이황은 율곡을 ‘후생가외(後生可畏)’라 하며 칭찬했다 한다.


율곡은 1564(명종19)년, 29세에 처음으로 호조좌랑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예조좌랑, 이조좌랑을 역임하고 1569(선조1)년에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574(선조7)년39세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이후에도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47세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1584년 49세에 안타깝게 졸하셨다.


선생은 정치사회적으로도 일찍이 임금에게는 성군이 되는 길로 나아가기를 청했고, 신하들에게는 사리사욕과 당파싸움을 멈추고 나라와 백성의 살길을 열어나가는 데 주력해야 함을 주장하며 몸소 실천하고 노력하셨다. 이러한 대표적인 노력이 ‘십만양병설’이다. 뿐만 아니라 학문, 정치, 경제의 모든 영역에서도 민초들의 삶과 정세를 탁월한 식견과 통찰력으로 예견하며, 현실의 부정부패를 개혁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하셨다.


율곡 이이의 기론(氣論)은 조선 성리학의 완성, 기호학파의 형성에 기여


율곡은 특히, 주자가 사단칠정(四端七情)을 구분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의 4단은 성(性) 즉, 이(理)에서 생기고 7정은 정(精) 즉, 기(氣)에서 생긴다고 하는 설을 부정하며 4단과 7정은 본래 두 갈래가 아니고 이미 7정 속에 4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무릇 이(理)라는 것은 기(氣)의 주재요, 기라는 것은 이가 타는(乘) 것이다. 이가 아니면 기가 근거할 데가 없고, 기가 아니면 이가 의착할 데가 없다. 이미 이물(二物)도 아니오 또 일물(一物)도 아니다. 일물(一物)이 아니므로 일(一)이면서 이(二)요, 이물(二物)이 아니므로 이(二)면서 일(一)이다.”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떠날 수 없다지만 이와 기가 서로 섞이지 않으므로 일물(一物)이 아니긴 하지만, 이(理)와 기(氣)는 서로 간격이나 선후를 따질 수 없어 두 개로 보기도 어렵기에 이물(二物)이 아니라는 이른바, 이기일원론이라고 불리우는 율곡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은 정자나 주자를 중심으로 하던 당대의 학자들의 사상을 완전히 뒤엎어 조선성리학의 독창성을 확보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사상은 현실정치와 율곡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효(治效)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집에는 여유가 없어서, 염할 때에도 친구의 수의를 사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임금도 3일 동안 조회를 보지 못했으며 선비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함께 슬퍼하였다. 황해도 백천(百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다.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등 전국의 20여 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율곡의 묘소 아래에 부모님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이른바 역장(逆葬)이다.


하늘과 땅의 운행원리를 밝혔던 ‘천도책’이나 조선성리학의 ‘기철학’의 연원을 보여주었던 율곡의 묘소는 이미 파묘를 했던 곳에 다시 매장을 하였다. 이장하며 파간 자리에 다시 당신의 묘를 쓴 것이다. 또 율곡의 묘역 아래에 부모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른바 역장(逆葬)이다.
 
지금도 시골의 어른들은 ‘역장은 말이 안된다’고 하는 노인 분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을 고려하면 옛 선현들의 기론적 태도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명분에 근거한 이기론의 맹신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또, 앞산의 단정함은 있지만 풍수적으로도 대 명당의 요건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이미 일생의 삶의 궤적과 마찬가지로 율곡의 묘소는 소탈하면서도 무욕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산소를 보면 그 삶을 그대로 읽어볼 수 있는 것이다. 명당은 이른바 욕심의 산물이다. 이미 일생을 무욕의 삶으로 보내신 선생이 후대나 자신의 안일에 욕심을 내었겠는가? 율곡선생의 유허지를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볼 일이다.

정승안 교수 sovong@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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