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은 시집올 때 장만해 온 재봉틀(미싱)을 도둑맞고 울음을 터뜨린 며느리를 달래주기는커녕 이렇게 꾸짖었다.
"나라를 잃고도 울지 않던 네가 그깟 재봉틀 때문에 우는구나."
현실을 직시하면 며느리는 억울했을 것이다. 생계수단인 재봉틀 따위는 다 잊고 시아버지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을 테니.
지난해 여름 어느 날 어머니가 주민센터에서 받아왔다며 흐릿한 인쇄물을 내미셨다.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외할아버지가 징용 갈 때 고향 관청에서 작성한 명부였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징용을 갔다 온 사실을 몰랐었고, 어머니는 한자를 몰라 명부에서 아버지 이름 석 자를 읽지 못했다.
"신청하면 느그 외할배가 못 받은 품삯 받아줄 수도 있다 카던데" 하는 어머니에게 "언젯적 일인데... 그거 되지도 않아요" 하며 되돌려준 명부를 어머니는 한참을 바라보다 끝내 눈물을 훔치셨다.
"얼매나 힘이 들었을꼬..."
평소처럼 "그래도 넌 많이 배우고 기자라면서..." 하는 원망까진 안 했어도 무관심한 아들이 어머니는 못내 야속했을 것이다.
월남의 며느리처럼 나 역시 억울함이 없지 않았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되지도 않을' 외할아버지 징용 배상금을 받아내려 뛰어다닐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현실을 직시하면.
전범기업 미쓰비시 등에 대한 우리 재판부의 '배상' 판결에 아베는 경제보복으로 응징했고, 대한민국에선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가열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붕괴로 수산물을 비롯한 일본산에 대한 거부감은 있었어도 지금처럼 불매운동으로까지 불붙지는 않았었다.
방사능 오염이 어디까지 됐는지도 모를 일본으로 해마다 700만 명 이상이 여행을 다녀왔을 정도다.
이번 불매운동으로 우리의 상처와 분노가 방사능보다 참을 수 없는 것임이 입증된 셈이다.
이번호 커버스토리 주제는 '불매운동에 대처하는 그들(일본계 기업들)의 자세'다.
불매운동의 타깃이 된 일본계 기업들은 물론 억울하다 할 것이다.
일본계 기업에 다니는 게 죄도 아니고 '친일' 소리를 들을 일은 더욱 아니다. 자본이 일본 것이지 따지고 보면 한국 사람 일자리 아닌가.
불똥이 튄 것으로야 삼성전자만큼이나 억울할 일이다.
생계가 걸린 현실이 더 중요한 월남의 며느리, 징용 피해자의 외손자이지만 먹고사는 게 더 급한 나, 일본계 기업에 종사하는 무고한 우리 국민 모두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억울해도 식민지인으로 혹사와 멸시를 당한 우리 할아버지들만큼 억울하진 않다.
우리는 왜 우리의 현실만 호소하는가. 우리 할아버지들에게도 징용은 피할 수 없는 생계이자 현실이었다.
아베가 A급 전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영혼의 멘토'로 삼고 그 명예를 회복하려 (회복할 명예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리 안간힘을 쓰는 동안 나는 내 외할아버지가 징용 피해자란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무슨 현실이 그리도 급했던 것일까.
지금의 불매운동도 분노의 표출이겠지만, 기저에는 부끄러움이 있다.
현실을 핑계로 매번 외면해 왔던 부끄러움.
부끄럽다면 반성해야 한다.
월남의 며느리는 나라를 잃었을 때 울기라도 했어야 했다.
나 역시 어머니가 외할버지의 징용명부를 보여주었을 때 함께 분노하고 아파했어야 했다.
생계의 현실을 핑계 삼지 말고, 생계를 볼모로 역사의 진실을 덮으려는 바로 그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그것이 상처받은 민족의 후예로서 반성 없는 아베에 대처하는 최소한의 '현실적인' 자세다.
억울해 하기 전에 부끄러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