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두(1930~1989)와 류민자(77). 한국화단의 유명한 잉꼬부부였던 두 사람은 30년 전 생사를 달리했지만, 작품으로 정겨운 대화를 나눈다. 나란히 예술세계를 선보인다.
서울 평창동 소재 가나아트(이호재 회장)는 4일부터 27일까지 ‘하인두 작고 30주년 기념:류민자 개인전’을 펼치는 것. 가나아트센터 제1전시실에 하인두 화백 대표작, 제2,3전시장에 류민자 화백 작품 등 모두 46점을 내건다.
하인두 화백은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1세대 추상화가다. 서양화가인 그는 한국의 전통과 불교 사상을 기초로 한 비정형의 추상을 선보이며 한국적인 추상화를 실현했다. 반면 한국화가인 류민자 화백 또한 전통성과 불교적 도상을 작업 소재로 탐구하며 추상과 구상 모두 실험했다.
하인두 화백은 한국미술가협회 동인으로 보수적이었던 한국 화단에 ‘색면 추상’이라는 새로운 동향을 불러온 주요 인물이다. 유럽에서 유입된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았으나 작업에 내포된 근본적인 정신은 ‘전통’에서 찾고자 했다.
그는 불교 탱화 중 하나인 ‘만다라’의 기하학적인 형태와 우주의 흐름과 그 안의 본질을 깨닫고자 하는 불교 사상을 작품의 주요 기반으로 삼았다. 서양화가이지만 그의 작품은 빨강 노랑 파랑 등 원색으로 전통 오방색을 구현해 단청에서 나타나는 조형 효과나 색채 등 전통적인 기법을 작업에 적용해 한국적인 앵포르멜 화풍을 완성하기도 했다.
류민자 화백은 남편 하인두 화백의 영향을 받아 추상화, 서구적인 재료를 활용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함께 작업하며 매체와 표현 방식을 동양과 서양의 영역을 넘나들며 다양하게 실행했다. 그는 짧은 붓질로 물감을 겹겹으로 쌓아올려 모자이크 형태의 색면을 완성해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 섰다. 단청의 오방색도 보인다.
한편 자연이 아름다운 양평 청계리에 잡은 그는, 자연의 생명력이 넘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작품에서 구현했다. 류 화백은 이 자연 풍경을 ‘유토피아’ 내지 ‘정토’라 말한다.
2일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류민자 화백은 “참 세월이 빠르다”면서 “남편은 좋은 스승이자 벗이어서 답답할 때면 얘기도 건네곤 했는데 이젠 그렇게 해줄 사람도 없어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하인두 화백 1주기, 10주기, 20주기에 이어 30주기를 기념해 이번 전시를 마련한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은 “작품이 한층 좋아졌다”고 덕담을 건넨 뒤 “꽃다운 미모로 유명했던 류 화백과 스승인 하 화백이 각각 26세, 38세에 결혼하자 당시 화단이 술렁였다”고 50년 전 결혼 뒷이야기를 전했다.
류 화백은 자녀 셋 낳고 열심히 살았지만 결혼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말했다. 하인두 화백이 결혼 전 이북이 고향인 친구를 하룻밤 재워주면서 신고하지 않아 60년대의 철통 보안법에 걸리는 바람에 평생 제대로 된 직장도 힘들었고 해외 체류도 제재를 받는 큰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후 3년만에 부부 전시를 했던 에피소드는 그래도 행복이 깃든 추억인 듯했다. “막내를 낳고 급성간염에 걸려 딱 죽을 것 같았어요. 남편에게 ‘그림도 못 그리고 죽게 돼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더니 말없이 휙 나간 후 다음날 ‘전시장 잡아놨으니 그림 그리라’고 하더군요.”
그날로 깔깔대고 웃었다고 했다. 그간 쌓인 마음의 앙금이 녹아내렸고, 한밤에 천정에다 불교적 색채의
그림을 마음으로 그릴 정도로 새로운 예술 세계를 펼칠 힘을 얻게 됐단다.
류 화백은 자연의 변화무쌍함에서 창조적인 에너지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맑고 깨끗한 세계, 피안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 보는 이들이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자신의 최근작에 대해 “예전보다 훨씬 밝고 좋아졌다”고 자평하는 류화백에게 남편 하인두 화백은 영원히 살아 있다. “그림에 동양화 서양화가 어디있냐. 네 마음대로 그려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란 남편의 말은 지금까지 큰 힘이 되었다.
“하인두 화백의 조교였던 박서보 화백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것을 보며 무척 부러웠다”는 류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인두 화백 작품 전시를 제 생전에 꼭 했으면 좋겠다”고 몇 번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