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능력은 축복이다. 하지만 망각의 능력은 더욱 큰 축복이다. 이 사실을 말해주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기억했지만, 그 때문에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뇌과학 분야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우리의 철학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성숙해진 그녀의 삶의 과정은 감동을 안겨준다.
망각은 생존을 위한 기술
2006년 2월, 뇌과학 분야의 유력한 학술지 중 하나인 ‘뉴로케이스’에 실린 한 논문이 큰 화제가 됐다. 논문의 제목은 ‘비상한 자서전적 기억의 사례’. 캘리포니아 대학교 신경생물학과의 제임스 맥거프 박사를 비롯 2명의 연구진이 함께 연구한 결과를 담은 이 논문에는 어떤 날짜를 제시하든 그 날짜에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과 사고를 상세히 기억할 뿐만이 아니라, 그날 자신이 먹은 음식들과 만났던 사람들까지 완벽하게 기억하는 한 여인 ‘AJ’의 사례가 등장한다. 맥거프 박사의 연구팀은 전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단한 기억력을 설명하기 위해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야만 했다. 뇌 영상 촬영 결과 일화기억의 인출을 담당하는 좌우 대뇌피질의 특정영역이 일반인들에 비해 큰 걸로 나타났다. 얼핏 보면 축복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엄청난 기억력은 그녀에게 커다란 고통이기도 했다. 인간에게 망각의 능력이 있는 것은 일종의 생존을 위한 기술이다. 선택적인 기억을 통해 부정적인 기억을 지우고, 미래를 향해 새롭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기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
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 들었던 상처가 되는 말들, 남편을 잃은 기억 등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역시 마구 떠오르기 때문에 그때마다 잊고 싶었던 과거의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가 그 당시 느꼈던 절망감, 우울함, 비통함, 모멸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엄청난 기억력을 가진 독특한 인물에 대한 놀라움만 담긴 것이 아니다. 책 속에는 보통사람과는 다른 능력으로 인해 세상에 대한 경계심과 상처가 많은 유년기를 지낸 가슴 아픈 사연, 그리고 그런 아픔을 딛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연인을 만나고 사별하게 되기까지의 과정 등 한 명의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결을 가진 삶과 그 애환이 담겨 있다. 질 프라이스는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고 덤덤한 어조로 들려준다.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엄청난 자서전적 기억력을 소유한 사람으로만 여겨졌던 논문 속의 ‘AJ’는 질 프라이스라는 이름으로 세상 앞으로 당당하게 나와, 자신의 이야기가 인간 기억력의 신비를 푸는 데에 일조를 했으면 하는 바람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목소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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