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뒤에 숨은 채 수족을 앞세워 명령하는 건 이제 끝났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5개월만에 돌연 귀국을 감행했다. 여전히 회사나 자신을 둘러싼 국내사정이 좋지 않지만 해외‘원격 경영’은 접겠다는 의지다.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자’던 그가 내 논 카드는 일단 ‘8,000억원’. 하지만 느슨해진 삼성, 수족도, 조직도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한 이 회장의 ‘언언(言言)’이 심상치 않다. ‘수족’ 이학수 체제는 무너지는가. 기업의 방향 수정마저 예고한 이 회장의 귀국. 삼성은 변(變)하는 것일까.
‘수족’ 이학수 체제 무너지나
폭풍전야의 고요 같다. 5개월에 걸친 해외 ‘원격 경영’을 접고 돌아온 이건희 회장을 맞은 삼성그룹 안팎에선 갑작스런 동요나 혼란은 체감되지 않는다. 사실 삼성을 둘러싼 국내외 견제 움직임 속에서 이 회장의 해외체류마저 5개월간 이어졌지만 삼성은 지난 한해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1월말 종료된 그룹 임원인사에서 삼성의 현 사장단은 전원 유임됐다. 오래도록 삼성에 몸담았던 사람들조차 ‘사상초유’라고 말할 정도다. 단지 삼성물산만이 회사손실을 이유로 사장직을 교체했다.
삼성출신의 한 재계대표는 “삼성이 이같은 인사를 단행한 것은 기업은 실적으로 대변된다는 데 기초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즉 “작년한해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현 사장단이 좋은 실적을 내줬고 이 회장의 사장단 유임조치는 그들에 대한 회장의 신임이 반영된 것”이란 지적이다.
이 회장은 또 그룹내 홍보라인 인사에도 후한 점수를 매겼다. 지난해 온갖 궂은(?)일을 도맡은 홍보라인의 임대기 구조본 상무를 전무로, X파일 사건 파문을 막는데 주력했던 구조본 김준식 상무보를 상무로, 이종진 부장을 상무보로 각각 승진조치 했다.
이 회장은 특히 X파일 뿐 아니라 반도체와 휴대전화, LCD 등 그룹의 주력사업을 성공적으로 홍보한 김광태 삼성전자 상무를 전무로, 노승만 상무보를 승진 직후 구조본으로 복귀, 변함없는 자신의 신임을 확인시켰다.
하지만 기업실적과 홍보에 관한 한 변함없는 회장의 신임을 보여준 임원인사와 달리 이 회장은 기업외적인 ‘잡음’을 ‘단도리’하지 못한 책임을 일단 자신에게 묻는 것으로 공항 귀국인사를 대신했다.
기업외적인 ‘잡음’단도리 못한 건 ‘내 탓’?
이 회장이 해외에 머무는 동안 삼성은 안기부 X파일에서 드러난 불법 정치자금 제공의혹,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 등을 통한 정치권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 압박과 함께 ‘반 삼성 분위기’마저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지면서 창업 60년만의 최대위기라는 혹독한 곤경을 겪었다.5개월간의 해외 체류기간 동안 이같은 국내 현실을 보고하는 역할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겸 부회장이 맡았다. 그는 이 회장의 해외체류 내내 격주 한번꼴로 국내 사정을 보고한 뒤 지시사항을 전달받은 그룹 살림의 총책임자였다.
이 회장의 급작스런 귀국은 바로 이학수 체제로 진행돼 온 보고와 지시전달의 사실상 종료로 분석된다. 더이상의‘리모콘 경영’보다 평상시 이 회장의 스타일대로 대면(對面)보고, 대면(對面)지시로 돌아가겠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하지만 X파일, 삼성에버랜드 주식 편법증여 등 지난해 파문에 대해 “작년 1년간 소란을 피워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말과 함께 “전적으로 책임은 나 개인에게 있음”을 강조한 이 회장이 굳이 “1등하는데만 신경을 쓰다보니 국내에서 (삼성이)비대해져 느슨 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며 본격적인 ‘삼성 바로 잡기’채비를 다진 속내는 과연 뭘까.
‘반 삼성’아우르고, 조직 ‘쇄신’
상처받고 흔들리는 삼성맨을 아우르고 국내 팽배해진 ‘반 삼성’국민감정까지 해소할 ‘빅 카드’는 무엇일까. 이 회장의 고민은 일단 기업의 방향을 국민에게 가까이 가는쪽으로 수정할 태세다. 글로벌 기업으로 앞만보고 달리다 보니 국내기업중 월등히 커버린게 사실이지만 그만큼 국내에 더 신경을 썼어야 한다는 질시의 눈초리를 외면했다는데 근거한다.
삼성그룹이 지난 7일 발표한 대국민 선언은 이제까지 삼성이 국민의 기대와 여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판단아래 ‘반 삼성’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데 맞춰졌다. 8,000억원에 달하는 사회기금 헌납, 헌법소원 등 소송 취하, 사회공헌 지원 확대 및 외부 비판모임 발족과 구조본 조직개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재계는 이 회장의 돌연귀국이 무엇보다 자신이 직접 부딪혀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만큼 이같은 대국민 선언과 함께 내부에서도 특단의 조치가 병행될 것이란 전망이다. 자신이 해외에서 발표한 신년사를 통해 “해외 곳곳에 제2의 삼성을 건설하고 세계 1등 제품을 더 늘려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것”임을 밝힌 있지만 무엇보다 귀국현장에서 그가 경고한 ‘느슨해진 삼성’은 그룹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또다른 ‘살생부 예고’일지도 모르는 셈이다.
베이지색 재킷 휠체어맨 ‘이건희’
아무도 예상 못한 ‘깜짝 귀국’...주목되는 ‘초일류 삼성의 과제’
베이지색 재킷에 검은 목도리, 휠체어에 앉은 세계 초일류의 귀국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기습’입국이었다. 작년 9월4일 역시 기습적으로 이뤄진 출국이래 5개월만의 귀국이었다.
막내딸 마저 외국에서 불미스럽게 잃은 채, 산책도중 미끄러져 발까지 다쳤다며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입국장에 들어선 이 회장은 오랜 해외생활의 피로와 그간의 마음고생 때문인지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아주 짧은 대답으로 일축했지만 그는 국민 앞에 사죄했다. “지난1년간 (삼성이)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는 이 회장의 사과는 오랫동안 장막 뒤에 숨은 채 수족을 앞세워 명령하던 재벌총수의 과거를 돌이켜 보게 했다.
“이제야말로 국민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솔직한 입장을 밝혀야 하지 않는가. 차라리 더 혹독하게 당하면 당사자가 직접 나와 국민과 부딪치며 대화할 수 있을 것인지…”본지가 지난해 10월 보도한‘삼성죽이기 왜’커버스토리에서 한 재계 석학이 토로했던 일침. 새삼 이 회장의 깜짝 입국 뒷면에 그가 마무리지어야 할 또다른 초일류 삼성의 과제가 남아있음을 상기해야 할 듯 싶다.